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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회원들의 수필

고국답사기 2006년 10월 23-30일

가을길에서 (2006년 10월 고국답사기)

김순임


10 월 23 일 화요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오늘부터 8 일 동안 함께 여행할 여성모임 회원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떠 올려본다. 정숙, 국남, 차조, 금희, 숙희, 영옥, 정자, 미자, 숙영... 약간 이상한 기분이다. 서울에서 만나게 되다니....
출근을 서두르는 벤지에게 “지하철역 독립문을 어떻게 가지?” 하고 물으니, “엄마 택시 타고 가 한다.” 방향감각이 별로 둔하지 않다고 자부 하는데 서울에 오면 언제나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친척 중 한사람이 항상 가이드로 따라 나서든지 아니면 택시를 이용하고 만다.
“기사님 독립문에서 제일 가까운 출구에 내려주세요.” 하고 택시 기사 에게 약간 걱정서린 목소리로 부탁했더니 기사는 나를 힐긋 쳐다보았다. 40 년의 타국생활이 나를 완전히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의 어설픈 이런 비한국적인 행동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눈길을 다시한번 나에게로 돌리게 한다.
하아!!!............ 독일국기를 할랑할랑 흔들며 서있는 박정숙과 회원 몇사람이 눈에 띠었다. 기발한 아이디어! 독일기를 준비 해오다니. 도착하는 회원들마다 엉뚱한 정숙의 장난에 폭소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꼭 장난만은 아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커다란 독립비문이 서있는 작은 공원으로 가꾸어져있는 우리들의 출발장소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빈터인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전쟁 중 일본군 성노예 희생자들을 (정신대할머니) 위한 박물관을 세울 장소로 서울시에 신청중 이라는 곳이다.
이번 여행이 성사하도록 애써주신 정숙의 자매 흥순님 그리고 8 일 동안 우리의 길잡이가 되실 한운수 기사님 과 인사를 나누고 12 인승 버스에 올랐다. 날씨는 흐리고 가랑비까지 내리고 있다.
"어제 내린 폭우로 산길이 무너질 염려가 있어 백담사에서 절에 오르는 길 통행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우리의 첫 목적지인 백담사는 오늘 못가고 안동 하회마을에 갔다 다시 올라와서 백담사를 봅시다." 우리 가이드 정숙의 첫 안내말씀이다. 여기저기서 뭐 하러 다시 올라와 백담사는 이번에는 그만두지 하는 의견들이 나오고, 꼭 백담사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은 정숙은 달리는 차속에서 손전화로 다시 한 번 그곳에 확인 통화를 해본다.




가능하다면 방향을 백담사로 돌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곳의 안내말씀은 부정적이었다. 버스안은 첫 목적지부터 차질이 생기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아무도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이 없고 이제는 고국도 이정도로 책임자들이 환경보호에 애쓰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가볍게 백담사를 포기하고 오늘은 영주 부석사, 도산서원 그리고 안동에서 저녘 식사후 하회마을에서 첫 여장을 풀기로 했다. (사진 버스 와 운전수) 먼저 경기도 남양시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나숙희를 대리러갔다. 약속장소에서 숙희는 나주배를 한상자 안고 버스에 올라왔다. "와...나주 배 !"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그 나주 배를 숙희 아버님이 직접 농사지으셨다니 더욱 감격스러웠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누군가가 벌써 배를 깍아서 앞뒤로 돌리기 시작하고, 입속에서 사근사근 슬슬 녹아나는 그 배맛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독일에서는 상상도 할수없는 감격스러운 맛이다. 80 고령의 숙희 부모님은 대부분의 배농사 농민들이 어린이 머리만큼 큰 개량종 배를 재배하는 것과는 달리 아직도 재래종을 최소한의 농약을 사용하며 재배 하신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차가 강원도를 지나 경부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어린시절 수학여행 떠나는 차속에서 한껏 부풀었던 기분들로 차속이 어벌쩍 떠들썩 했던 것처럼 우리도 기분이 밝아지면서 여기저기서 활기찬 대화들 과 기분 좋은 웃음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금년은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서 단풍이 별로 아름답지 않아 아쉬울 것이라 하기도 하고, 산이 이렇게 많고 기후도 그리스와 비슷하니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올리브를 재배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왜 우리나라 아나운서들은 똑 같은 음성 과 똑 같은 억양으로 뉴스를 읽는지 듣기에 거북함을 넘어서 거부감이 생기기도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중에 누군가가 "이번 여행기는 누가 쓰나?" 한다. 자동적으로 한두사람 입에서 "조국남!" 한다 "나는 이번에는 안 쓴다". 국남의 단호한 목소리. "그럼 내가 쓸게." 나는 자신 없지만 글 쓸 일 있을 때 마다 국남에게 밀어부칠려는 여성모임의 고질(?)이 여기서도 발병하는 것 같아 얼른 받았다. 누구도 아무 부담 없이 이여행을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솔직히 말 하자면 나 자신은 약간 부담스럽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스스로 짊어진 짐을.....




그러다가는 즐거운 여행은 즐기고 쓰는 일은 여행후 쓸수 있으면 쓰고 힘 드는 일이 된다면 그만두지 하고 결정하고 나니 내 마음도 가볍다.

고국의 아름다운 가을 산들이 가깝게 그리고 멀리 달리는 버스 유리창을 스치면서 사라지면 다시 다른 산 과 벌판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나는 독일에서 두 아이들을 기르면서 하고 싶었던 일 두 가지를 실천 하지 못했다. 하나는 아이들의 초등학교 삼사학년을 시골 어느 학교에 보내고 싶었고 또 하나는 아이들이 칠팔학년 때 온 가족이 배낭을 메고 도보로, 버스로 그리고 기차로 조국강산을 다니면서 함께 문화역사 공부를 하고 싶었다. 산은 자꾸 오고 또 사라진다.
단체여행을 많이 운전하셨다는 기사님은 우리일행을 어떻게 분류해야할지 몰라서 그런지 버스가 강원도를 지나서 충북으로 들어갈 때까지 침묵 속에서 차를 몰지만 운전솜씨는 약간 거칠어서 우리가 바뿐길 아니니 위험한 추월은 삼가라는 경고를 하니 힐끗 쳐다보는 시선에 많은 물음표를 안고 있다.
고속도로 주변에는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광고 와 선전물들이 즐비한데 그중에 '관광문화 전문도시 단양' 이라는 약간은 웃기는 허풍스러운 문구가 있는가 하면 '베트남 며느리 중매 합니다' 라는 우리를 슬프게하는 광고문도 있다. 외국인 노동자, 국제결혼 이주여성,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한국사회에 새로운 사회문제가 아슬아슬하게 확대되어 가고 있음을 보도매체를 통하여 알고 있는 우리는 이런 광고문이 차창을 지나칠 때마다 가슴을 아리게하는 슬픔같은 것을 느낀다.

정숙 과 흥순님이 밤 새워 준비하였는지 달리는 차속에서 12 사람이 먹고 또 먹어도 김밥을 다 해 치울수 없다. 한국에서 가장 길다는 죽령재 터널을 지나 영주에 도착하여 소수서원 과 선비촌을 둘러본다. 선비촌의 주막에서 막걸리라도 한잔 주ㅡ욱 마시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냥 다시 버스에 올라 부석사로 향한다. 고국 답사지만 전문 안내인 없이 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 가 보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지자제 도입 이후 지역발전을 지역 스스로 해결해가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역사성이 있는 것들은 단장을 시키고 해설문들을 곁 드려서 관광객을 모으기에 바뿌고 특산물들을 장려하여 상품화하기 위해 축제들을 많이 하는데 그중에는 무안의 마늘축제, 함평의 나비축제, 나주에는 배 축제, 또 상주서는 곶감 축제 등을 한다. 40 년 전에 노동 이주민으로 독일에 간 우리는 가는 곳마다 축제요 관광지마다 돈을 쏟으는 사람들로 붐비는 잘 살게 된 한국을 보는 것도 싫지는 않다.





부석사로 향하는 도로변의 사과밭에는 탐스럽게 익은 붉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려 나뭇가지들이 휘어지고 있다. 사과나무들은 자란지 몇 해 되지 않는 어린 나무 같아 보이는데 저렇게 많은 사과들을 달고 있으니 아마도 개량종인가보다. 차에서 뛰어내려 하나 뚝 따서 와삭 베어 먹고 싶은 욕심이 날 정도로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부석사에 도착한 우리 여행 첫날 오후는 바람이 엄청난 속도로 불어서 체중이 가벼운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바람에 날릴 것 같다. 얼마나 와 보고 싶었던 부석사 인가! 그런데 날씨가 태풍 과 시커먼 먹구름을 동반하고 이러니 은근이 화가 치민다. 의상대사가 절을 세울 때 바위가 공중에 뜨는 기현상이 일어나서 부석사라 부르게 되었다던데 그때도 돌이 날려갈 정도로 바람이 몰아쳤던 것은 아닐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었다.
한국의 건축가들이 '가장 잘 지은 고건축' 으로 평가했다는 무량수전에 들어가 아미타 부처님께 3 배를 드리고 나와 무량수전 앞에 서서 유홍준씨가 대한민국 국보 0 호로 지정하고 싶다는 태백산맥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장엄하게 펼쳐지는 전경을 바라본다. 아~~~!!! 의상대사는 화엄세계를 장엄할 이 자리를 찾으려고 얼마나 많은 짚신을 바꾸어 신으셨을까!? 가슴이 뭉클해온다. 먹구름을 이고 있는 대기 때문에 유홍준씨의 부석사 예찬론에 나오는 최상의 아름다움은 아쉽게도 접할수 없지만 그 예찬론이 허풍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고 신록의 5 월의 아침이나 가을의 석양에 펼쳐지는 전경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예술을 보는 눈이 없는 나에게 우뚝 서있는 당간지주 와 무량수전 앞의 석등이 오래 동안 내 마음에 새겨질 것 같았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부석사는 창건주인 의상대사에 대한 많은 설화를 안고 있다. 그 설화들은 시대 와 쓰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 같다. 그중에 여성이 주인공인 설화 하나만 소개한다. 여성은 지구의 절반이 아니던가! 원효대사 와 요석공주, 황진이 와 서화담 그리고 의상대사 와 선묘 아가씨 등 역사는 청정도인들 주위에도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배를 타고 중국 유학을 떠난 의상이 도착 한 곳이 등주였다. 계속 먼 길을 가야할 의상은 그곳 어느집에서 하룻밤 쉬게 되는데 그집 딸이 그만 신라 진골 출신인 젊은 스님 의상에게 반해버렸다. 의상은 흔들림 없이 공부하러 떠나고 중국 아가씨 선묘는 세세생생 의상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것을 맹세 한다. 종남산의 지엄 화상에게서 화엄학을 배우고 신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선묘의 집에 들려 예전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고마운 인사를 드리고 배에 올랐다. 그때 집에 없었던 선묘가 돌아 왔을 때는 의상의 배는 이미 떠난 후였다. 선묘는 한달음에 선창으로 달려가 배가 떠난 쪽을 향해 풍덩 바다 속으로 뛰어 들면서 바다의 용이 되어 의상의 배가 무사히 신라에 도착 하도록 보호할 수 있도록 빌었다 한다.



귀국한 의상국사는 화엄세계의 이미지를 장엄할 절터를 이곳에 정하고 신라 문무왕 16 년(676 년)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부근에 생활근거지를 두고 약탈행위를 하던 도적들이(혹자는 사교의 무리들 이라함) 불사를 방해함으로 선묘의 혼이 큰 바위가 되어 무리들의 위에 부웅 뜨니 그들이 놀래어 물러났다 한다. 그래서 부석사에는 선묘도를 모신 선묘각이 있고 일본에서는 선묘사라는 절 까지 세우고 선묘상을 만들어 오랫동안 신앙의 대상으로 모셨다한다. 부석사를 뒤로하고 꾸불꾸불 산길 과 굽이굽이 안동댐을 따라 도산서원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여 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막무가네로 밀고 들어갔지만 안내원도 없고 대부분의 전시실은 불이 꺼저 있어서 그 야말로 휙 돌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 선생은 이조 연산군 7 년(1501 년)에 안동군 도산면에서 출생하여 34 세에 과거에 급제 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후 명종 16 년(1561 년)에 도산서당을 세워 후진양성에 힘써 이 나라 교육과 사상에 큰 맥을 이룬 분으로 성현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사후 유림들의 노력으로 선조 7 년(1574 년)서원을 세웠으며 그때 선조는 한석봉 친필을 사액(서원이나 사찰의 현판을 임금이 하사함)하였다. 1970 년 정부가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도산서원을 성역화 하였다.(이상 인터냇에서 발췌).
저녘 7 시가 넘어 정숙의 언니 명숙님의 화실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 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리셨을까? 언니는 자그마한 냄비에 우리를 위해서 햇밤을 다글다글 삶고 계셨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가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신다는데 크고 작은 그림들이 큰 화실을 꽉 체우고 있다.
우리는 독일에 오셔서 작품전을 하시라고 격려 하면서 언니가 ‘이웃집’이라는 식당에서 베풀어주신 청국장 과 고등어구이가 겯드린 저녁 식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 치웠다. 너무 너무 맛이 좋다. 저녁식사 후 숙영은 안동에 살고있는 동생과 함께 가고 우리는 하회마을 번남 민박에 도착하여 시계를보니 21:00 시다. 방에 들어가 배낭을 방구석에 쌓아두고 둘러보니 우리가 어려서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밥 먹고 공부하고 잠도 잣던 방 그대로다. 이제는 친척 방문을 해도 대부분 말끔한 아파트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렇게 정겨운 옛날 집에 들어오게 되니 모두 감격해서 “어머!!!....우리 옛집에 왔네!” 한다. 모두 씻고 아직도 기운이 팔팔한 이들은 동동주를 주문하고 피곤한 사람들은 자리에 누우려고 하는데 정숙의 막내 동생 부부가 딸 까지 앞세우고 인사차 왔다한다. 어두운 길을 이렇게 늦게 찾아오다니... 정숙의 형제들은 이렇게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살기 때문에 모두 잘 사는가 보다고 혼자 짐작한다. 


10 월 24 일

가을 아침 햇빛이 마당으로 쏟아지는 아침의 번남민박은 밤에 느꼈던 것보다 더 격렬한 향수를 일게 한다. 추수를 몇일 앞둔 만족스러운 그러나 약간은 분주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시골 우리집 마당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부지런한 우리는 아침식사 전에 동네를 한번 돌아보고 앞마당에서 기공을 한다. 담을 따라 피어난 코스모스들이 살랑 살랑 고개를 흔들면서 잘 왔어 잘 왔어 하는 것 같다. 시래기국 과 깔끔한 배추전 그리고 고등어구이를 올린 아침식사는 어떤 찬사도 필요없는 너무나 맛좋은 식사다. 이번에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안동 고등어구이가 유명하다는 것이다. 번남 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무슨 특별한 뜻이 있는가 민박 주인께 물어보니 아주 간단한 대답이다. 옛날 이집안에 번남이라는 촌에서 시집온 분이 있었고 그분이 이집안 식구가 된후로 집안이 크게 번성하였기로 그때부터는 이집이 번남(댁) 집이 되었다 한다. 마당의 장독대며 화단의 가을꽃들 그리고 마루에 쏟아지는 햇살들이 하루쯤 더 머물고 싶은 아주 깔끔하고 정겨운 곳이다. 어제 동생 따라 간 숙영에게서 몸이 불편하여 동생집에 있어야 겠다는 연락이 왔다. 빨리 회복하여 우리와 다시 합류하길 바라면서 배낭들을 챙긴다.
하회마을은 자동차 통행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기사님은 동구 밖에서 기다리시게 하고 우리는 도보로 마을을 한바퀴 돌고 마을을 안고 흐르고 있는 낙동강변으로 나간다.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답사객은 우리 뿐인것 같다. 맑은 강물 과 깨끗한 모래사장이 드높은 푸른 하늘을 이고 거기 있었다. 우리들의 얼굴도 모두 맑고 평화로워 보여서 맨발로 모래벌판을 거니는 모습들이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 같다. (낙동강 사진 영옥 정자 숙희) ......................




아쉽지만 고래등 같은 기와집, 주렁주렁 열린 박을 아슬아슬하게 이고있는 초가집, 바람 따라 금비를 내리고 있는 늙은 은행나무, 그리고 마을 주변의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 벼논등이 어울려서 소리 없는 전원 교향악을 연주 하고 있는 하회마을을 뒤로하고 10:30 분 병산서원에 도착하다.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유교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는 병산서원에는 전문 안내원이 있어서 만대루에 모여서서 그의 유창한 안내에 귀를 기우린다. 병산서원은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서애 유성룡 과 그의 셋째아들 유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봄 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향사를 지낸다. 유성룡은 1542 년하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25 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많은 벼슬을 지냈다. 그는 1592 년 임진왜란 때 탁월한 정치인의 안목으로 인재를 천거 등용(이순신, 권률)하고 전란으로 혼란에 빠진 백성들을 선도하여 의용군을 모집하며 군량미를 준비 하는 등 조선을 전란에서 구했던 공신으로 조선의 5 대 명재상중에 속한다. 말년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하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한다. 이책은 임진란시 영의정으로 재임하면서 격었던 고통스러웠던 7 년 동안의 전쟁사를 기록한 기록문학으로써 국보 132 호로 지정되어있다. 유성용의 사후 유림들이 1610 년 그의 사당을 지은 후 서당에서 서원으로 승격 되면서 사액을 받았다. 고종 5 년(1868 년) 흥선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문을 닫지 않고 선비들이 계속 공부를 했던 47 개 서원중의 하나였다고 안내원은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병산서원은 7 폭의 병풍을 펼쳐 놓은 것 같이 우뚝우뚝 서있는 산 아래로 흐르는 낙동강 과 백사장 을 전경으로 지어졌으며 소슬 대문으로는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선비나 양반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모든 관광객들이 이문을 드나든다. 잘 보존되고 있는 만대루, 입교당, 위패를 모신 존덕사, 와 3000 권의 도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장경각등을 둘러보고 나와서 아랫사람(상놈)들이 사용했다는 지붕 과 문이 없는 달팽이모양의 화장실 통시를 보면서 우리는 웃는다. 양반 과 상놈은 출입문 뿐만 아니라 화장실도 따로 썼던 시대를 상상해보니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눌려 살던 백성들에게도 유모는 있어서 지붕 없는 화장실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볼일을 보면 통쾌하고 시원하다고 해서 통시라고 했다한다.




맑은 아침공기 속에 안온하고 잘 정리 되었으면서도 자연의 일부처럼 서있는 병산서원을 뒤로하고 버스는 안동역으로 간다. 서울에서 있을 재외동포활동가 대회에(10 월 24~27 일) 참가할 차조 와 영옥을 배웅하기 위해서다. 그들 과 헤어진 우리는 주왕산으로 향한다. 옛날 왕위를 빼앗긴 주왕이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는 이상한 전설이 있는 주왕산은 경북 청송과 영덕 사이에 있는 국립공원이다. 높은 산은 아니나 기암절벽 이며 폭포와  시원한 소가 곳곳에 있어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곳인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덩달아 산위에 까지 따라 올라갔다. 그사이 우리와 친근해진 기사님은 ‘여기서시오’ ‘저기서시오’ 하면서 우리더러 기념사진 찍으라고 재촉을 하는가하면 이상하게 우뚝서있는 바위를 가리키면서 저 바위를 ‘남자의 거시기 바위’ 라고 한다고 농담까지 하신다. 산에서 내려오니 목마르고 허기가 져서 모두들의 눈이 즐비하게 서있는 간이식당으로만 간다. 드디어 우리 전주가 ‘파전 좀 먹고 갈까요’ 하니 모두 기다렸던 것 처럼 우루루 한 주점으로 들어가 둘러앉아서 파전 과 도토리묵 에 온갖 과일을 둥둥 뛰우고 있는 동동주를 주문하여 단숨에 먹어 치운다. 더 먹고 싶지만 오늘저녁에 엄청 잘 먹을 것이니 그만 먹자고 우리 전주가(정숙) 말린다. 버스는 어느새 다시 동해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구불구불 돌아서 영덕에 도착하니 바닷가에는 온통 식당천지인데 식당마다 대게 선전문이 요란하다. 대게를 얼마나 대량생산을 하기에 대중식당의 메뉴가 되었을까. 아니면 한국의 생활수준이 대게쯤이야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높아진 것 일까. 나는 정말 한국을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기사님은 저녁 식사 전에 풍력발전소 먼저 보자고 한다. 우리는 바람개비 풍력발전소야 독일에도 흔해빠졌는데 시끄러운 그곳에 일부러 갈 필요가 뭐 있겠는가 했지만 기사님은 한국의 풍력발전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원대로 우리는 바닷가 언덕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몇 개의 발전용 바람개비를 보러간다.

풍력 발전소 보다는 거센 바람타고 밀려오는 엄청난 파도 와 석양의 반사로 붉게 물든 바다위의 구름이 우리의 시선을 더 사로잡는다. 바람이 너무 세고 시장하기도 하여 우리는 빨리 어시장으로 내려온다. 기사님은 능숙하게 시장 안 어느 게 가게로 우리를 안내한다. 수많은 게들이 우글거리고 있고 상점주인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한다. 한국게, 러시아게, 중국게, 알라스카게 너도게 등 종류 도 많다. 그중에 너도게 라는 게는 이름이 이상하다고 했더니 주인의 설명이 우리를 웃긴다. 알라스카게 와 사할린게를 배합해서 만들어 놓고 보니 너무 못생겨서 ‘너도 게냐?!’ 하고 한숨을 쉬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게를 먹을 만큼 주문하고 몇사람은 건어물을 산 후 위에 있는 식당에서 잠간 기다리니 삶은 게를 수북하게 식탁에 쌓아놓는다. 모두들 눈이 둥그래진다. 나는 우리가 너무 식탐을 하지 않나 싶다. 껍질이 두꺼워서 그렇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라고 흥순님이 우리를 안심 시킨다. 모두들 한손에 가위를 다른 손에는 게를 잡고 대게 오르기를 시작한다. 베를린에서는 Ka De We 같은 백화점에서나 엄청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대게를 이렇게 작은 산처럼 쌓아놓고 먹고 있는 우리, 더구나 사치스런 대게를 먹는 곳 이지만 너무나 소박한 아니 초라하게 까지 보이는 식당 과 오가는 종업원들, 모든 것이 좀 어떨떨하다. 어제는 고등어구이 와 청국장 먹고 정겨운 번남댁 온돌 에서 자고 오늘은 대게 파티 후에 아모래 러브호텔 의 편한 침대에서 자게 되었으니 어제 와 오늘 사이에 한국의 양면성을 우리는 실감한다. 어제 번남 댁에서 아침 식사를 즐기면서 나는 오래전 우리아이들 과 영국답사 시 즐겨 찾아 다녔던 호반의지역 유스호스텔을 생각했다. 영국의 사양귀족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경우 그 성을 박물관으로 만들거나 유스호스텔을 만들어 만인에게 공개를 하면서 그 성들을 유지 하고 있다. 남편은 아이들 과 나를 자주 그런 곳에 대리고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영국의 문화역사를 터득하게 해 주었다. 번남 민박 역시 집의구조로 보아 옛 양반집인 것 같으나 생활을 위해서 후손들이 용감하게 민박으로 개방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 해 본다. 고찰이나 폐사지를 찾아다니면서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배우면서 감탄하는 것만이 고국답사가 아니라 우리가 고국을 떠난 40 년 후의 변화한 한국 사회상을 보고 느끼는 것 역시 보람 있는 답사임을 알게 된다.




10 월 25 일

남성용 향수까지 비치한 러브호텔 아모래 에서는 미리 예약 하지 않고 들었기 때문에 아침식사를 제공할 수 없다고 한다. 어제부터 구룡포 의 복국찬사를 하시던 기사님은 버스를 ‘함흥 복식당’ 앞에 세운다. 일부는 식당에 복국아침식사 하러 들어가고 일부는 오징어잡이 어선들이 즐비하게 서있는 바닷가를 산책한다. 어선들은 양옆에 즐비하게 등을 달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밤에 오징어잡이를 할 때 불 을 밝게 켜고 하면 오징어들이 때를 지어 몰려든다고 국남이 설명해 준다. 발밑에 보이는 바닷물은 참으로 맑아서 물고기 헤엄치는 모습들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제법 잘 정돈된 상태의 선창가에는 여기저기 어망이나 어부들이 사용하는 물품들이 널려있는데 한 곳에 허름한 작은 버스가 서있다. 버스에는 구직알선, 노인 휴식처 등의 문구들이 쓰여 있다. 국남 과 나는 동시에 어부들을 위한 Sozialamt 라고 짐작한다.(사진 버스) 철강 산업으로 한국의 경재발전에 앞장서느라 엄청난 굴뚝들이 세워진 포항으로 버스가 들어서니 산업도시 특유의 도시계획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널찍한 도로 와 미끈하게 뻗어 올라간 고층 상가들 나는 대구를 방문했을 때처럼 내 고향 전라도와 비교해본다. 길이 넓고 고층건물이 즐비해야 만이 그 도시가 잘 발전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영남 출신 대통령들 치하에서 호남 과 영남 지방 의 차별적인 발전상은 삼척동자도 알아 볼 수 있으리라.



그동안 독일 촌사람들 끼리 만 보낼 수 없어 여기까지 우리를 동행했던 흥순님 과 포항 버스 터미널에서 헤어졌다.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우리는 계속 통도사로 달린다.

통도사는 송광사(승보) 그리고 해인사(법보) 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종찰 중의 하나로 대웅전에 불상이 아닌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불보사찰이다. 선덕여왕 15 년(646 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자장율사는 당나라 유학시 오대산에서 기도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받아와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금강계단에 그 사리를 모셨다한다. 한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에서 계를 받으며 그 스님들은 모든 진리를 회통하고 중생을 제도한다 하여 통도사라 이름 하였다고 안내서에 쓰여 있다. 또한 취서산(옛 산 이름)이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 하셨던 영취산 과 비슷하다 하여 영취산 통도사로 불린다.

놀라운 일은 영남의 부산, 대구, 포항 등 도시에서만 부가 넘쳐흐르는 것이 아니라 영남의 절에서도 넘쳐나는 부를 느낄 수 있다. 사찰내에는 기도하는 신도, 관광객, 답사객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여기저기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 드리고 구경도 한 후 공양간(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다. 정갈스럽고 맛있는 절 음식 오랜만이다. 떡 까지 먹고 후원으로 나오니 부지런한 숙희는 배낭을 짊어지고 앉아서 이절 신도들 과 더불어 체소를 다듬고 있다. 맛있는 밥 얻어먹었으니 밥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부처님은 금강경을 설하시던 무렵 스라바스티에서 1000 명이 넘는 제자들 과 더불어 걸식을 하셨다. 물론 일생동안 걸식 하셨지만 나는 금강경을 통해서 이따금 부처님 과 제자들이 걸식하는 모습을 아주 선명하게 상상하곤 한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은 엄청난 민폐라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수행하는 스님들께 보시하는 것을 복짓는 일이라 하며 부처님 당시에는 왕족 과 부자들은 다투어서 부처님 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드렸다. 물론 그때의 스님들은 부처님처럼 일일 일식 즉 하루 한 끼만 드셨다. 부처님 시절 탁발(걸식)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부처님께서 하루는 제자 아난 과 마하가섭에게 어떻게 탁발을 하느냐고 물었다. 아난은 가난한 집은 나누어 줄 음식이 없을 것 같아 일곱 부자 집에(칠가식) 서 얻어오고 마하가섭은 가난한 자들이 빨리 복 많이 받고 부자 되라고 가난한 집에만 가서 얻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부자 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지 말고 탁발하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때로부터 2500 년도 더 지난 오늘 우리는 부처님 진신사리 모신 절에 와서 걸식을 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북적거리는 본사보다는 조용한 암자라도 하나 더 보고 싶어서 어떤분께 걸어서 갈 수 있는 암자를 하나 알려 주라 했더니 자장암으로 가라고 한다. 자장암 이라면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수도했던 도량이리라. 가까우리라 생각했던 자장암은 의외로 멀어서 90 분 이상을 걸었다. 상당히 지쳐서 암자에 도착하니 어떤 남자가 암자에서 나오면서 “오늘 금와(금개구리)보살이 나왔는데 여러분은 복있는 사람들이오” 한다. 우리는 그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 자장암은 신라 진평왕때(587) 세워진 절이며 자장율사와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했다 한다. 관음전 뒷 바윗속에 작은 구멍이 뚤려 있는대 그곳에 금개구리가 살고 있으며 그 개구리를 자장율사가 길렀다는 전설이 있다. 금와보살은 항시 볼수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복이 있어서(그 남자 말) 그 신기한 개구리를 보았다. 금빛 찬란한 개구리가 아니라 눈 과 입 가장자리에 아주 가느다란 금빛선이 그어져있다. 신앙은 전설의 도움이 있으면 날개를 달고 확장된다. 그래서인지 자장암에서도 금개구리를 금와보살이라 부르며 금와보살을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자장암은 바위 위에 지어서 그랬던지 법당에 상당히 큰 바위가 바닥으로부터 돌출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날씨는 화창하지만 내려오는 길은 기사님께 부탁하여 차로 내려온다. 버스는 이제 경주로 향한다. 한글 과 더불어 한국문화의 자존심 경주, 보문 관광단지를 조성하여 경주의 고전미에 상처를 만든 경주, 그러나 아직도 수많은 한국의 보물들이 천년이 넘도록 숨쉬고 있는 경주에 오후 4 시경 도착한다. 여기 저기 이것 저것 볼것도 많겠지만 버스가 먼저 발견한 주차장에서 내리고 보니 분황사다. 어느사이 독일기는 기사님의 손에서 떠나질 않고 우리는 그기만 따라다니게 되었다. 분황사에는 무료 전문 안내인이 있다. 외세의 침략 방어를 기원하며 선덕여왕 16 년에 세워졌던 동양에서 가장 컷던 높이 225 척의 구층탑이 있었던 황룡사는 국찰 이었던 반면에 분황사는 여왕의 사찰 이었다 한다.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큰딸로  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신라 최초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인자함과 생전에 선덕여왕 예지 3 가지를 역사에 남길 정도로 지혜를 겸비한 여성 이었다 . 그 예지란 당 태종이 모란꽃씨를 꽃그림 과 함께 보내 왔을 때 그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예언 했으며,  한 겨울에 난데없이 개구리들이 울어대니 백제군이 신라를 치기위해 여근곡에 잠복해 있다고 하면서 군대를 보내 전멸토록 하고 아프지도 않고 건강하던 때에 자신이 죽을 날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여왕은 평생 독신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면서 이웃나라인 백제 와 고구려로부터 끊임없는 국경침범을 당해 나라를 지키는데 고심이 컸다. 그는 해마다 당에 조공을 바치고 유사시에 당의 원병을 청하는 일이 빈번했다 한다. 당 태종은 신라는 여왕이 통치하므로 이웃 나라가 함부로 침범한다는 ‘괘씸한‘ 발언을 함으로써 국내의 여왕통치 반대파들이 반란을 일으킬 이유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에 남겨진 선덕여왕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나 경주 여기 저기에 남겨진 선덕여왕시대의 문화유산들은 그녀가 연약한 여성이 아니라 어질면서도 배포가 큰 여성 통치자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녀가 황룡사에 80M 높이의 거대한 구층 목탑을  세우고 분황사를 비롯 여기 저기 많은 절을 짓게 한 것은 불심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다른 나라로 부터의 침략을 막으려 했던 것이라고 한다. 나이가 듬직한 안내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천 삼사백년전의 서라벌 사람이 되어본다. 선덕여왕은 얼마나 마음이 아름다운 여성 이였기에 자기를 사모하는 백성이 한번 만이라도 여왕을 뵙고 싶어 자신이 지나갈 길에서 기다림에 지쳐 잠이 들었음을 보고 그의 가슴위에 끼고있던 팔지를 빼어 올려놓고 갔을까?  이것이 그냥 지어낸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살았던 서라벌이 그립다. 나는 내 발밑의 땅을 한 번 내려다본다. 자장율사 그리고 원효 와 의상 스님들이  구도자로써 오갔던 분황사의 뜰....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고뇌를 풀고 진리를 찾는 수행승들이 있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 끝이 없어서 일 것이다. 부처님이 설파하신 사바세계 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종교 와 신앙을 통해 넘어서고 그러면서 넘치는 신앙심으로 절 과 교회를 짓고 불상을 조성하고... 후에 그런 것들이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어 우리 같은 후예들이 가서 보면서 감탄하고.... 분황사 뜰에서 밟히는 돌조각들은 모두 선덕여왕의 역사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이틀 동안 여장을 풀 정숙 의 옛 친구 경주 동국대학교 이봉춘 교수댁으로 향한다. 분황사에서 약 30분쯤 달리니 벼가 무르익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넓은 들판을 앞에 두고 낮은 담 과 대문 안에 잘 정리된 잔디와 어린 정원수들이 자라고 있는 아담한 집이 있다. 왼쪽으로 작으마한 황토 방 과 정자까지 갖추고 있는 이집에 우리는 모두 한눈에 반해 버린다. 집주인 과 인사를 나눈 후 몇 사람은 부엌으로 몇 사람은 집 앞 채마밭에 나가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 채마밭에서 신이 나서 상추 와 숙갓을 따고 있는 우리에게 이교수가 와서 옆집 할머니 밭이니  너무 수탈 하지말라고 하신다. 그래도 우리는 8 사람이 먹을 만큼 푸성귀를 솎아가지고 부엌으로 간다. 부엌에서는 정숙이 친정어머니가 싸주신 된장을 풀고 여러 가지 밑반찬들을 내어 놓고 있다. 부지런한 숙희 와 정자는 상추감을 씻고  금희 와 나는 방에서 두 다리 쭉 펴고 저녁식사를 기다린다. 오늘 저녁 반찬은 절에서나 먹을 수 있는 산초장아찌, 마늘 고추장아찌, 멸치볶음,  새우무침, 배추김치, 갓김치 그리고 호박 된장국 과 상추 등이다. 반찬도 맛있지만  우리들의 입맛도 대단하다. 저녁식사 후 불국토라 불리는 경주 남산을 안내 해주실 동국대학교 백경림 교수님이 오셔서 서로 인사를 나눈다. 백 교수는 내일 저녁에 자기의 박속나물 솜씨를 자랑하신단다. 불교사가 전공인 이교수에게 재미있는 불교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나는 너무 피곤해서 눈이 자꾸 감겨온다. 10월 26일: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받으면서 우리는 잔디밭에 모여서 기공을 하고 국남은 타이지를 한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우리는(베를린 회원들) 폼을 잡기 힘들지만 금희, 정자, 국남 들은 진짜 마이스터 들이다. 아침식사후  대구의 이경희님께 독일에서 여성모임회원들이 고국 답사 왔노라 연락을 하고 버스에 오르니 벌써 10시가 되었다. 경주 박물관 까지는 우리 버스로 45분 거리다. 박물관 전시실 과 크나큰 정원은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인산인해 여서 앞을 봐도 교복 입은 학생들이 와글와글 뒤를 봐도 와글와글 좌우를 봐도 와글와글 이다. 우리도 독일기를 따라 잠깐 동안 우왕좌왕 한다. 우리일행 중 두 사람 서울 가고 숙영은 못 온다고 연락이 왔기 때문에 이제 7 사람이지만 함께 다닐 수 없음을 판단하고 두 시간 동안 각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2 시간 후에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앞에서 만나기로 한다.



봉덕사종 또는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리는 이 종은 효심이 대단했던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아들 혜공왕에 의해 완성(771년)되었는데  무려 30 여년이 걸렸다 한다. 세계의 전문가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소리로 평가한다는 에밀레종의 장중하고 맑은 종소리를 왜 이제는 직접 타종을 하지 않고 경주시 에서는 정시마다 녹음된 종소리를 들려주는가에 대하여 그리고 이 종에 얽힌 역사를 유홍준 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75~197쪽)에서 자세히 읽을 수 있다. 우리는 녹음된 종소리지만 정오의 타종을 듣기위해 여기 저기 자리를 잡고 기다린다. 그러나 워낙 박물관 내외가 시끌벅적 거려서 별스런 감흥을 기대하진 않는다. 나는 에밀레종에 담긴 전설을 생각한다. 인간은 아니 우리민족은 감상적인 전설이나 야사를 너무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범종, 부처님의 음성이라고 하는 종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지게 하는 종을 만들기 위해서 과연 어린아이를 펄펄 끓은 쇳물 속에 집어던질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서라벌 사람들은 서라벌이 불국토라 고 했을 만큼 불심이 대단하였다고 하는데... 불교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불살생의 계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종교가 아니던가? 30년이나 걸려서 만든 종이니 어린아이를 희생하지 않았어도 능히 모양과 소리가 동시에 아름답게 만들 수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느릿느릿 소음 속으로 사라지는 녹음된 종소리를 듣는다.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며,
 진리의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
 그런고로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을 달아 진리의 둥근소리를 듣게 하셨다.
 무릇 종소리란...
 그 메아리가 끊이지 않으니
 장중해서 옮기기 힘들며,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  에밀레종 에 새겨진 명문 중에서...
종소리를 들은 후 기념품 파는 곳에 가서 카세트라도 하나 살려고 했더니 정숙이 우리에게 선물하겠다고 막무가내다. 카세트는 7개 밖에 없다. 창고에 더 많이 있다고 한다. 한 시간 후에 금희가 다시 가게에 가서 차조, 영옥 그리고 숙영을 위해서 산다. 우리는 약속대로 25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있는 박물관을 각자 보려고 헤어진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 사이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선사시대의 유물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예술품까지 보러 다니기가 숨차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까지 유물 15만 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관은 고고관, 미술관, 안압지관, 옥외전시장, 어린이박물관으로 분류 되어있다. 학생들을 인솔하는 선생님들은 어린학생들에게 ‘조용조용’ 이라던가 ‘빨리빨리 가’ 하면서 학생들을 그저 박물관을 한 바퀴 돌게 하는 것 같다. 금관이나 불상 앞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설명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문화역사교육은 그냥 몇일 동안 책상 과 칠판을 떠나 단체로 버스타고 왁자지껄 하면서 다니는 것인가? 우리는 13시 30분에 다시 모여 박물관 구내 간이식당에서 시장기를 알리는 위를 달랜 후 다시 버스에 오른다.  다음 목적지는 백율사다. 어제 밤 불교역사가 이교수로부터 감동 과 의심으로 경청했던 백율사 와 이차돈의 순교에 대한  전설은 백율사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을 능히 참을 수 있게 한다.



신라의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하여 불심으로 백성들을 통치하고 불력으로 국운을 번영하려 하였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이차돈은 자신이 순교하여 이적을 보여서 왕이 뜻을 이루고 신라가 불국토가 되기를 염원하였다. 왕은 그의 뜻을 반대했지만 그는 짐짓 큰 불사를 시작하여 왕이 허락하여 이차돈이 큰 절을 짓고 있다고 소문을 내었다. 불교를 배척하던 신하들이 벌 때처럼 일어나니  왕은 이차돈을 불러 그를 벌하게 되었다. 하리가 그의 목을 베자 머리는 멀리 날아가 지금의 백율사에 떨어지고 그의 목에서 하얀 피가(?) 솟았다 한다. 왕 과 신하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불교를 공인 하게 되었고 그 후 왕은 이차돈이 절을 짓던 자리에 흥륜사라는 절을 짓고 왕위는 진흥왕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법공이라는 이름의 수행자가 되었다한다.
백율사의 범종각이 서있는 자리에 이차돈의 목이 떨어졌다고 하며 대웅전에 모셔졌던 신라 3대 금동불상중의 하나인 약사여래입상은 현재 경주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다. 이차돈의 순교 전설을 배경으로 세워졌다는 이절은 당대에는 상당히 번창했을 큰절로 사가들은 추측한다지만 가파른 산비탈에 세워진 절집은 탑을 세울만한 장소도 없을 만큼 협소하여 대웅전 동편 암벽에 탑을 새겼다한다. 예전에 큰 절이 있던 자리라고 믿기에는 힘들 정도로 가파르게 비탈진 자리다. 가는 곳 마다 전설이 가득하고 1000년도 넘은 역사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곳이 경주다. 우리는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 드린다. 여성모임 회원들이 가는 절마다 대웅전이나 관음전에 들어가서 거부감 없이 절을 하는 모습에서 이제는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허세 와 욕망 그리고 교만 같은 것들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모습, 아니 완전히 털어 버리고 싶은 소망 같은 것을 본다. 그런 모습이 아름답게 나에게 전해 옴을 느낀다. 다시 버스에 올라서 우리는 안압지로 향한다. 안압지에 도착하니 날씨가 꾸물꾸물 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에도 다행히 전문 가이드가 있다. 통일을 이룬 신라는 전쟁으로 어려워진 국내의 상황도 다시 회복하고 태평성세를 누리게 되자 귀족들은 물론 왕궁에서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며 문무왕(674년)때는 궁내에 큰 연못을 만들었다. 당시의 이름은 월지라 하였으나 신라 패망 후 인공연못을 돌보지  않고 그냥 두니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오리나 기러기가 서식하므로 이조시대의 선비나 문사들이 안압지라 불렀다한다. 1975년에 대대적으로 발굴 작업을 하여 35000여점 유물이 발굴되어서 경주 박물관에 안압지관을 별도로 만들 정도였다. 안압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고분 출토품과는 달리 대부분 생활 용품이라는 것이 특이하여 당시 왕실의생활을 추측할 수 있다 한다. 연못은 어디에서 봐도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그것은 신라인의 탁월한 조경 술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이곳 역시 교복입은 학생들로 만원이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은 독일기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우리들을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지나간다. 나이는 지긋해 보이는데 화장도 하지 않고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도 한국여성과는 다른 우리들의 거침없는 움직임을 보면서 약간 질린 표정으로 돌아서는 학생들도 눈에 보인다. 나는 베를린에서 1시간만 백화점에 다녀와도 피곤해지는데 오늘은 박물관 과 백율사를 또 안압지 까지 돌면서 기행문 맡은 죄로 나름대로 신경을 썼더니 이제는 이교수집에 들어가 쉬고 싶다. 그런데  “첨성대는 꼭 보자!” 하고 미자가 다짐한다. “아~ 첨성대 그것 너무 허망해요.” “온갖 미사여구와 찬사로 우리를 설래게 했던 첨성대 와 포석정은  학창시절 수학여행때 나를 여지없이 실망시켰는데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요. 첨성대는 아마 미자만 할거야.” 사실 내 기억은 그러했다.



“그래도 보자!” 미자 의 단호한 반응. 나는 그때도 기행문을 써서 교지에 발표 했던 것 같다. 무엇을 어떻게 썼는지 잘 기억할 수 없지만  첨성대와 포석정에서 느낀 허망함을 억울하다고 했던 것 같고 달빛 속의 해인사 홍류동의 아름다움을 재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을 탄식했다고 기억한다.
첨성대는 안압지에서 도보로 약 20 분 거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첨성대를 향해서 걷기 시작 한다. 오른쪽에 무르익은 벼논을 지나 여러 가지 약초가 자라고 있는 밭 과 왼쪽에 우뚝우뚝 굽이굽이 왕릉들을 지나서 첨성대에 도착한다. “어머~ 첨성대!” 가을의 해질녘 허허 벌판에 첨성대는 고고한 기품을 지니고 거기 그냥 서있다. ‘신라사람들은 저렇게 작은 천문대에 올라가서 기상을 관측하고 별자리를 보았나?’ 하고 빈정거려도 아랑곳없이 첨성대는 거기 그렇게 천사백년이 넘도록 그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있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의 파장이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면서 어린 시절 무지의 소산인 실망의 기억들을 어루만지고 있다. 총 401개 화강암을 이용하여 정사각의 기단위에 완만한 곡선의 병 모양의 원주형으로 올리고 다시 맨 위에 우물정자 모양으로 돌을 놓았다. 부드러운 곡선과 힘찬 직선미가 조화를 이룬 신라 특유의 아름다운 돌 건축물이라고 안내서가 일러준다. 첨성대는 밑지름이 5.1m 정상의 지름은 2.5m 이고 높이는 9.1m 이며 27대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천문대라고 하지만 첨성대에서 기상관측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사가들의 추측이지 그에 대한 사료가 없기 때문에 정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한다. 
오늘의 답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저녁 6시다.  몇 사람은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식사 준비하고 남은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피곤한 손발을 씻는데 대구에서 이경희님이 반찬을 한 짐 싸가지고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도 크지만 소문난 그의 음식솜씨인지라 그야말로 환상적인 저녁식탁이 우리를 자극한다. 청포묵 과 녹두묵, 오이소박이와 적당히 잘 익은 열무동치미는 천하의 일미다. 거기에 시원한 동동주를 곁들이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경희님은 정신없이 먹어치우는 우리모습을 넉넉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다. 친구들 만나기만하면 먹이고 싶고 먹고 난후에는 한 보따리 싸서 손에 들려주고 싶어 하는 그다. 피곤한 몸에 잘 먹고 동동주 까지 한잔 마셨더니 이제는 자리에 눕고 싶은데 여성모임회원들은 이 교수 에게 불교공부 하겠다고 빙 둘러앉는다. 나이 50~60이 되어도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로 살고 있는 이 여자들이 너무나 좋다. 금희 와 나는 경희님과 자리를 옮겨 편안한 자세로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풀기 시작한다. 그러나 몇분 지나지 않아 내 귀에는 두 사람의 도란거리는 소리가 멀리 멀리 아스라이 사라져 간다. 


10월 27일

우리는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세수 와 샤워를 한 뒤에 짐을 쌓아 마루에 모아놓고 집안 청소를 한다. 쓰레기까지 국남이 황토방 아궁이에 사른 후에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고 서서 기공 과 타이지를 한다. 이 아름다운 집을 오늘 떠나면 정숙 외에 누가 또 다시 올수 있을까? 아쉬운 마음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백경림 교수의 안내로 남산 답사의 길에 오르기 전에 Bremen에서 그림공부 하고 귀국하여 경주 동국대학에 출강하고 계시는 희상 스님께 전화 드렸더니 10분도 안되어서 달려오셨다. 이교수 댁에서 멀지 않는 절에 계시는 모양이다. 수행하시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는 것 만도 나는 즐겁고 행복하다. 이렇게 서고  저렇게 서서 여러 장의 기념사진들을 박은 후에 이봉춘 교수님 과 희상 스님께 떠들썩한 감사의 작별인사를 드리고 버스에 오르니 10시 30분이다. 헤어질 때 버스에 오르는 나에게 희상 스님은 “경주의 남산은 수행하는 스님들도 불국토라고 부른답니다. 잘 택하셨습니다”. 하신다. 그렇지 않아도 사진 과 글을 통해서 남산의 마애불상들이나 감실 부처님을 무척 보고 싶던 차에 백 교수님이 안내까지 해 주신다해서 사실은 약간은 들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