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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시민의 신문" 에 연재된 에세이

재독한국여성모임과의 첫 만남 (유정숙)

재독한국여성모임과의 첫 만남

유정숙 재독 한인 여성회 회원




1985년 4월, 나는 이미 나이 서른이 넘어 독일에 왔다. 그때까지 한국에서 살아온 삶을 다 물리치고 다섯 살 된 딸아이와 독일의 탄광도시인 보쿰에 도착하였다. 남편도 같이 왔다.

처음 일년간 박사과정의 이수에 필요한 어학코스를 할 동안 나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외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이미 변화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것 하나는, 내 주변의 "독일적" 상황이 내가 다 "물리치고" 온 한국 생활을 정신적으로 정리하고, 현재를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데 더 없는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 여성으로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아 갈등을 느끼며 왜 이래야만 할까라는 질문을 자주 하면서, 그래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조롱이 담긴 "저 잘난 맛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나의 주변은 그런 질문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신의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많은 여성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일년 후에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도 대학근처에 얻고, 딸아이는 학교가 끝난 후 어린이집으로 가서 오후 5시까지 사회, 공동생활을 하게 되니, 나에게 학교에 가서 조용히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나는 독일에 와서야 한국인들이 이미 60년대부터 간호사, 광산근로자로 독일에 취업이민을 왔다는 사실을 소상히 알게 되었고, 그것에 대한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한국에서 정치학 석사까지 공부를 하고, 더욱 학생운동의 물결 속에서 뭔가를 한답시고 어려운 시절도 겪었다는 내가 그 당시 한국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일반적인 상황조차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보쿰 대학의 수업내용에는 현실 정치와 관련된 강의들이 아주 많았다.
 
이것도 또한 한국과 다르구나 하면서 속으로 "통쾌함"을 느끼면서 강의내용들을 보니 그 중에 유럽에서의 외국인정책이라는 것이 눈에 띠었다. "아! 이거다 이게 내가 할 일이다" 하는 생각이 그 순간에 들었고, 그 후 지금까지도 나는 그 문제와 맞붙어 싸우고 생각하고 있으며, 내 박사학위논문의 주제도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 어느 날 한국식품점이 개업을 했다. 나는 너무 좋아 빨리 달려가서 뭐가 있나 하고 살펴보았으나 가난한 학생신분으로 이것저것 많이 살 형편은 안되었다. 식품점 주인은 한국 남성이었는데 대화를 좋아하는 분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는 나에게,  "독일에 재독한국여성모임이라는 것이 있는데 혹시 그런 모임에 참여할 마음은 없냐, 회원들은 주로 간호사로 온 사람들이지만 과거에는 유학생들도 꽤 참여를 했다.
 
그러나 독일의 한인사회에서는 이 모임이 "빨갱이" 여성모임이라고 낙인 찍혀있다는 것은 우선 알고 있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이 정보가 꿈 같이 다가왔다. 그 큰 한국사회에서도 여성들끼리의 모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데, 여기에 그런 모임이 있다니! "빨갱이" 여성들이 모인다니! '분명히 뜻도 있고 생각도 있을 것이니 당연히 멋진 여성들일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저에게 빨간색 옷이 잘 어울려 자주 입어요"라고 말하면서 그 여성들을 좀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독일에 와서 내가 그런 한국여성들의 모임에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해보았고, 그 놈의 "빨갱이"란 말은 한국에서부터 지긋지긋하게 들어 오히려 나에게는 어떤 사람이 그렇게 찍혀 있으면 호기심을 유발하는 개념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지역모임의 회원들을 사귀게 되었고, 1987년 가을, 프랑크푸르트 근교에서 전체 여성모임이 열릴 때 총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상당히 긴장을 했던 것 같다. 세미나에서 우리 지역이 시사를 담당하게 되어 내가 그 시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나는 열심히 신문을 읽고 준비를 해 갔는데, 다른 토론들이 너무 많아 시사가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한 회원이, "그래도 새 회원이 열심히 준비를 해 왔으니 다만 10분이라도 듣자"고 하는 바람에, 나는 그에 맞추어 따발총처럼 말을 한 기억이 난다.
 
그러니 꼭 선보이러 간 느낌이었다고 할까? 회원들과 공통된 경험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그래도 뭔가 공통된 경험이 있나 하고 찾던 중, 한 회원이 바로 얼마 전에 예산의 구억말에서 3년 간 일하며 살다 왔다고 하는 바람에 얼마나 좋았는지! 그 구억말에서 살고 있는 한 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공통된 경험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던 것 같다.


회상과 자기치료
   
여성모임의 총회나 세미나에서는 공식 프로그램이 끝나면 저녁부터는 자유시간을 갖는다. 회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밥솥, 김치 등을 들고 와 토요일 저녁에는 꼭 한국음식을 만들어 둘러앉아 먹는다. 내 기억으로는 아직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이것을 해 온 것 같다. 사실 한국음식을 하려면 여러 가지로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힘이 들어 몇 번 이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꼭 이래야만 우리들의 만남이 즐거운 것인가 하고 몇 시간을 토론한 후에, “다음에는 하지 말자!”고 결정해도 결국 실천이 안 된다. 언제부터인지 이에 대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오히려 일년에 두 번, 전체회원이 모이는 때에는 누가 회갑이 되었나를 살펴보고 우리 나름대로 성대한 회갑잔치를 연다.

최근 50대에 이르는 회원들의 걱정은, ‘우리가 회갑이 되면 다른 회원들은 더 나이가 들어 힘이 없을 텐데 과연 우리 회갑잔치를 누가 차려 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은 그러니까 우리가 회갑이 될 때까지 다른 연장의 회원들이 건강하게 살도록 우리가 “열심히 모시는 수밖에” 없음이다.

밤이 깊도록 몇 명씩 어울려 두런두런 이야기하다보면 회원들은 자주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나도 요사이는 나의 어린 시절 등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게 되었으나, 한동안은 나의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하기가 어려웠다. 회원들의 옛날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별 어려웠던, 정말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들이 허다하다보니, 평탄하기만 했던 내 어린 시절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어 우선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들었던 이야기도 또 듣고 하면서 가만히 보니 이야기를 하는 회원들이 그러한 회상을 통해 자기치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느 순간, ‘나도 스스로를 치료해야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왜 또 남들을 배려하느라 입도 못 열고 가만히 있나’하고 나의 문제를 본 순간, 이게 아니다 싶어 말을 시작했다. “저는요, 그 당시에 큰 도시에 살다보니 유치원도 다녔구요, 국민학교 때 피아노로 배우러 다니구요, 중학교 시절에는 동대문 스케이트장에 하루가 멀다하고 스케이트도 타러 다니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그것만이 저의 어린 시절은 아니지요” 대충 이렇게 말을 시작한 것 같다. 하여간 이렇게 입을 열고 보니 마음이 후련해지면서 나에게 그리고 상대방에게 쌓아 놓았던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몇 년 전 한국방문 때 동창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한 동창이 자기 아이가 대학을 별로 시원치 않은데 들어가 속이 상해하는 것을 듣다가 내가 하는 말이, “얘! 우리도 말이지, 그 당시에 한국의 경제사정이 좋아 모든 여학생들이 똑 같이 경쟁해서 대학입학시험을 보았다면 어쩌면 우린 다 떨어졌을지도 몰라. 너, 그러니 너무 속상해 하지마” 하는 말을 던진 적이 있다. 독일에 와서 소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수 없었던 한국여성들의 뛰어난 능력을 경험하다 보니 이 말이 나온 것 같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회원들 사이에서 누가 대학을 나왔고 안나왔고 하는 것은 개인의 삶의 질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지 않는다. 처음에 여성모임에 나갔을 때는-그러니 벌써 17년이 지나버렸는데- 한국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이런 통상적 척도가 상당히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물론 서로 공통된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도 있었지만, 유학생으로서 온 동기와 간호사로서 온 동기가 “서로 다르다”라는 기준으로 작용되었던 것 같다.

여성모임의 초창기에는 유학생들이 참여를 하였다가 하나 둘씩 물러나 버리게 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작용을 했던 것 같다. 그저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르게 살았을 뿐 인 것을 가지고, 누가 잘 낫고 누가 못 낫고 하는 식으로 따지다 보면, 서로의 열등의식만 만들어줄 뿐이며, 인생사를 이리저리 따져보면 도토리 키재기를 하면서 자신의 삶의 질을 계속 망쳐갈 뿐이리라. 이런 도토리 키재기가 민족간에는 결국 인종차별주의로 확대되는 것이 아닐까?
 
한 가지,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은, 한국에서 70년대 중반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나는 한동안 소위 운동권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여성문제를 다루는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저 여성이론이 어쩌니 저쩌니 하며, 실제는 자신의 사회적 성공만이 관심사였지, 정말 그 당시 각 개인이 당면하고 있는 차별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스스로를 “슈퍼우먼”으로만 만들어 가는 장소여서 나는 때려치우고 말았다. 그런 것에 비하면 재독한국여성모임에서 “서로 다르다”고 느끼는 긴장감 정도는 그 성격이 아주 달랐다는 말도 여기서 하고싶다. 


나의 학창시절

나는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서 성격이 아주 강해 보인다는 말을 듣곤 했다. 내가 5살 정도 되었을 때 어떤 화가(?)가 나의 초상화를 그려 놓은 것이 있는데, 한복을 입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눈매가 매섭고 무엇인가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다. 어딘지 유관순 여사를 연상하게 한다는 느낌이다.
 
지금도 내가 누군가에 대해 뭔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꽤 있고, 간혹 상처까지 받는 것 같다. 그래도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한마디 더 해보자면, 바로 그것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학생시절에 어디서 반장을 해 본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위기적 상황이 생기면 모두 나를 찾았다. 선생님도 그렇고 동창이나 친구 그리고 가족들마저도 그랬던 것 같다. 어떤 선생님은 "너는 안경을 끼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좀 부드러워 보이니까", 아니면 "너는 아프리카에 가서도 추장을 할 놈이야"하는 식으로 대조적이다. 독일에 와서도 박사지도 교수가 어떤 추천서에 "이 사람은 자신의 목표가 확고하다"는 등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이다. 어떻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이 공평하지 못한 것, 그에 따라 사람들이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것들이 너무나 싫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나는 꼭 한마디를 했어야 했던 것 같다. 그러니 찍힐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을 배려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늘 전제로 삼아왔다.
 
그러나 나의 전제나 노력은 전달이 잘 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 같다. 겉으로는 목표가 뚜렷하고 잘 따지고 하는데, 그것이 남을 배려한 한 행동이라는 것을 누가 쉽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더욱 타인에 대한 배려와 할말을 해야하는 경향 사이에서 나 또한 내가 왔다갔다한다고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독일에 온 것은 나의 청년시절의 꿈과는 상관이 없다. 대학원이 끝난 후 미국의 버클리 대학을 가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어려서부터 사회활동을 습관적으로 하다보니, 대학시절까지 신문을 팔거나 아니면 카드를 만들어 팔아 추운데서 고생하는 국군장병아저씨들에게 선물, 감옥소 위문공연조직, 그 당시 버스 차장들을 상대로 그들이 여건상 못 배운 것을 소위 "가르켜" 주는 활동 등, 그런 일을 많이 하고 살았다.
 
대학 말기에 '이제는 내 길을 가겠다'고 생각을 하고 버클리의 꿈을 그리면서 있다가 상황이 묘하게 되어 학생회의 조그마한 역할을 맡게 되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그 이후의 나의 삶에 대한 결정적 계기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로 인하여 지금도 머리 속에 그림처럼 남아있는 것은, "기생관광반대데모"를 김포공항에서 할 때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 겨울 잠바 속에 집어넣고 공항에 갔더니 이미 정보부 요원들이 줄서있는 바람에 도망쳐야 했던 모습, 대학 채플 때 김민기 씨를 초대하여 헌금을 모아 운동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조직했을 때 사회를 보게된 나와 대학담당형사와의 긴장감, 그 다음날 신문기사에 김민기 씨가 갑자기 군복무를 떠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의 참담한 심정, 대학강당에서 철야데모를 하다가 결국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가 밤새 취조를 당하고 엄마까지 불려와 도장찍고 나를 데려가던 일, 이런 모든 일들 때문에 나와 가까이 있었던 교수들과 가족들의 수모, 그 이후 형사 한 명이 매일 나를 찾아와 괴롭히던 일-나는 학교도 못 가고 소위 가택에 갇혀 있었다-,
 
그래도 여러 명의 교수들의 협조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던 일,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대학 담당경찰부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묘한 감정, 유신헌법이후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감옥행을 해야 할 때의 절망감, 대학원에 들어 간 후, 감옥에서 나온 학생들과 소위 스터디그룹이 만들어져 운동하던 시절, 냉철한 이성만을 가지고 찾던 사랑의 우여곡절, 지명 수배된 친구들을 챙겨야 하는 비밀, 전화통화에 대한 불안감, 함께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 지금 한 장의 사진도 없는 것, 열심히 청계천 헌책방들을 돌아다니며 모아 두었던 사상계 등을 가택수사를 당할 것 같아 몽땅 불태워 버릴 때의 슬픔, 버클리의 꿈이 부르주아의 꿈이라고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던 날, 남산정보부에 끌려가 취조 당하던 시간, 가택수색을 당할 때 너무나 당당하던 엄마의 모습, 그러다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여러 가지 사생활이 얽히다가, 그러면 나의 길이 무엇인가를 찾던 중에 결국 독일로 오게된 것, 이 모든 것들이 아직도 내 눈에는 선하다. 


독일 '여성의 집 (Frauenhaus)' 1

나는 현재 '여성의 집'에 근무하고 있다. 한 독일여성이 한국을 갔다 온 적이 있는데,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만나면 "남편이 있느냐, 직업은 뭐냐, 자식은 몇이냐, 아들이 있느냐, 마지막으로야 너는 뭐하냐"를 당연지사로 묻는 바람에 질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막 웃었던 적이 있다. 이 사회에서는 친한 친구나 가족이 아닌 이상, 사람들을 만나면 서로 이름만 이야기하고 상관되는 일만 함께 하지 개인사를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니다.
 
예를 들면 나는 오래 전부터 사민당의 회원이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시민의 집'의 회장단에 속해있다. 이 일을 오래 하다보니, 때로는 회의가 끝나고 사적인 시간에 이런저런 이야기하다보면 간혹 친구가 "너 뭐하니"하곤 묻는다. 내가 "여성의 집에서 일하고 있다"고 대답하면, 그 반응이 남녀를 불문하고, 대체로 '심각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여성들의 경우는 당장 "그 일이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느냐?"고 묻거나, 남성들의 경우는 얼굴이 좀 굳어지면서 그때부터 나를 아주 '진지하게' 대하든가, 아니면 "여자들이 남자들을 때리게 만들지!"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말을 들르면, 나는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다"며 말을 끊어 버리고, 더 이상의 토론을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폭력-전쟁, 전쟁 속의 성폭력('정신대'), 가정폭력, 성폭력 등등-에 대해 폭력을 가한 사람들은 항상 이유를 달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여성의 집'은 25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독일에는 여성의 집을 운영하는 여러 단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 집은 '자율(autonom) 여성의 집'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말은, 독일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많은 여성의 집들은 제 각기 자신들의 여성에 관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그것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구호는 "여성이 여성을 돕는다,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재독한국여성모임도 올 가을에 25년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1975년 여성문제가 전세계적으로 의식화되어, 유엔이 '세계 여성의 날'을 선포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세계사조가 여성문제를 더 이상 도외시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독일에서 성격이 상이한 여러 여성단체들이 최근 대부분 25주년 기념행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적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느끼게 한다.
 
동시에 이런 사회적 환경은 여성들에 의해 쟁취되어진 것이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님도 사회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여성의 집'은 월급 뿐 만이 아니라 운영비까지 주 정부가 지원하고 있지만, 운영의 모든 면에서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율적 기구이다. 독일에서는 여성의 집이 사회적 장치로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얼마 전 한국 남성친구가 "거기도 아직 남성들이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해요?"라는 비양조의 말을 했을 때, 그러면 가정폭력이 아직도 '명태는 두들기면 부드러워진다'라는 말처럼 당연시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란 물음을 갖게 되었다.
 
1989년 서울에 처음 여성의 집이 만들어 질 때, 재독한국여성모임의 한 회원이 적극적으로 독일 녹색당재단이었던 '여성재단'을 통하여 이를 경제적으로 후원하며 창립을 도왔고, 그 이후 몇몇 도시에 여성의 집이 만들어 진 것은 알고 있다.

일년 전쯤 독일의 어떤 도시에 '남성의 집'이 개관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남성들도 '폭력'(여성에 의한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내가 사는 도시에도 그 '남성의 집'과 비슷한 것이 있다. 이 집의 별명이 '앵무새들의 집'인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모르나 좀 우스꽝스러운 이름이긴 하다.
 
이 집을 드나드는 남성들은 소위 '집 없는 남자 천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배경을 보면, 사회구조에 적응을 못하다가 술에 빠지고, 가족들과의 불화로 헤어지고 난 후, 실직에 경제적 무능력 등이 겹쳐 '집도, 가족도 없는 천사'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국가가 운영하는 '집 없는 사람'들의 무숙자 보호시설에 들어가 그 구조에 속박되는 것이 싫어 거리를 전전하다가, 그래도 며칠간 기거할 곳이 필요해지면 이 '앵무새집'에 들어와 지내곤 한다. 이들도 '사회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독일에 몇 천 개의 여성의 집이 있는 반면, 남성의 집은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은, 현 독일이 여전히 남성 폭력의 사회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독일 '여성의 집(Frauenhaus)' II

여성의 집을 찾아오는 여성들의 공통점은 '여성'이란 것과 '가정폭력'의 희생자라는 것뿐이다. 이 여성들이 겪게 되는 문제들은 각자가 천차만별이며, 법적 신원도 다양하다. 독일여성, 이주민여성, 불법체류 여성 등등. 특히 혼인으로 온 이주민 여성의 경우는 최소 2년 이상 남편과 동거했음을 증명하지 못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악법'적 외국인법에 의하여, 폭력을 당하더라도 그 시기를 견뎌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리고 여성들이 집에서 도망쳐 올 경우, 종종 자녀들을 동반하기 때문에 여성의 집은 아동의 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폭력의 가장 큰 희생자는 아동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아동시기에 각 자의 인성과 성격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이라고 하면 '남편폭력'과 동일시하는데 꼭 그렇지 만은 않다. 자식, 특히 아들이 엄마에게 폭력을 가하는 경우, 부모가 딸에게 가하는 폭력, 남자친구가 가하는 폭력 등, 그러니까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을 의미한다. 그 뿐 아니라 정신적 폭력도 있어, 그것의 희생자인 여성들 중에는 심리질환을 일으켜 정신병원을 드나드는 경우도 상당수가 된다. 소위 중산층 이상 그리고 지식인 집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흔히 지식이나 경제적 수준이 높은 가정에서는 폭력이 없거나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각이다. 대체로 그들은 수치감 때문에 공개적인 행동을 피할 뿐이며, 여건상 다른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의 집에 오지 않을 뿐이다.

여성의 집은 전화번호부에 연락할 번호가 적혀 있으나, 그곳에 거주하는 여성들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주소는 적혀 있지 않다. 남자들 중에는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위치를 찾아내어 그 근처에 와서 서성거리든지, 심지어 경찰이 곧 나타날 것을 알면서도 보호소 안으로 침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의 총기규제법은 미국과는 달리 매우 엄격한 데도 간혹 총을 들고 설치는 남자들까지 있다.
 
여성의 집이 2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 택시기사들이 주소를 알고 급할 때는 여성과 아이들을 직접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고 하니, 결국 이 주소에 대한 '비밀'이 깨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도움이 된다. 일을 하러 가다가 직장근처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너 어디 가니"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 나 지금 볼일이 있어 어디로 좀..." 식으로 대답을 해야 하는 실정이다.

나는 어릴 때 판사나 사립탐정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이 두 직업이 특히 정의를 판별하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무엇보다 여자사립탐정일 경우 가죽잠바, 가죽바지를 입고, 색안경을 쓰고는 뭔가를 밝혀낸다는 멋과 이미지에 반했던 것 같다. 물론 탐정은 되지 못했으나, '여성의 집' 일이 어느 정도 그와 유사한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매일 가죽옷을 입고 색안경을 쓸 일은 전혀 없지만, 상대하는 기관이 경찰서, 법원, 변호사, 외국인청, 사회업무국, 청소년보호청, 의사, 주거청 등등, 수많은 기관과 사람일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이들과 협력하고, 어떤 때는 따지고 싸우기도 해야 한다. 보호를 받는 여성들이 각자마다 다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인성 자체가 또한 다르니, 그들을 간파(!)하기 위하여서는 재빠르게 두뇌를 회전하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 다음 어떤 여성들은 다시 적절한 다른 곳으로도 보내야 하고, 여성의 집을 잘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금기사항들'이 몸에 배도록 도를 닦아야 하는 것을 보면 사립탐정 비슷하지 않은가!

여성의 집으로는 수많은 전화가 걸려오는데, 소위 '가출', 행방불명된 여성을 찾는 사람들의 전화일 경우, 우리들의 직업상(개인비밀노출금지의무), 그리고 일 자체의 성격상 "이 전화번호를 통해서는 어떤 여성에 대한 어떤 정보도 줄 수 없다"고 대답하게 된다. 그 말을 할 때는 모든 동료들의 목소리가 딱딱해 질 수밖에 없다. 만일 경찰이라고 하면, 일단은 저쪽의 전화번호를 받아 우리가 다시 전화로 확인한 다음 질문에 답을 한다.
 
간혹 나와 동료들의 친구나 가족이 일이 생겨 전화를 하고 싶어도 정말 급하지 않으면 전화를 하지 않는다. 목소리의 그런 딱딱한 느낌이 전달되어서 그런지 전화하기가 섬뜩하단다!

일을 하면서, 여성의 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가 드디어 자기 길을 찾아가는 여성들을 보면 내 머리카락이 그로 인해 희어져도 기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흔하여 슬프지만, 그러나 모든 것은 결국 본인의 결정과 책임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