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료실/- "시민의 신문" 에 연재된 에세이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이방인... (안차조)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이방인...

안차조(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독일에서 나의 삶은 올해 33년째가 된다. 그리고 독일국적을 취득한 지도 22년이 되어, 독일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살고 있다. 나는 생활 속에서 필요에 따라 한국인이 되고, 또 독일인이 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 그 원인들을 분석해보면, 매우 복잡하며 애매한데, 문제는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나의 행동양식을 은연중에 요구한 것에도 큰 몫이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독일문화로의 적응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동양 여성의 수동적 이미지를 당연하게 요구했다. 이 모순된 요구는 이중문화권에서 사는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마주하는 공통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나 자신과의 갈등을 자주 겪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자기소개를 할 때,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을 말하기보다는 항상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다.

독일인들도 내가 거주하는 곳을 묻기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먼저 묻는다. 그래서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독일에서 살아도 나는 이방인이다.

예방접종에 덜덜 떨었던 여중생
 
인간은 누구에게나 정체성 즉,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의식하고 산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5살이었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전쟁의 큰 피해를 경험하지 않았으나, 밤에 총소리가 크게 들려와 두려움에 움츠리고 잔 기억과, 낮에는 동네 아이들과 미군부대 주변을 돌아다니며 초콜릿이나 코코아가루를
얻어먹었던 기억이 난다.

심술궂은 미군들이 납작한 튜브를 던져 주었는데, 우리는 집으로 가져가서 낱낱이 뜯어 싹싹 핥아먹었다. 박하 맛과 약간 달콤한 맛이었는데 훗날 그것이 치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의 일을 나는 첫 아이 출산 후 체중이 늘어 몇 년 동안 다이어트로 고생을 하고 있었을 때 종종 회상하곤 했다.

6.25 전쟁 때 나는 단백질 부족으로 물이 차서 앞으로 툭 튀어나온 배로 기우뚱거리며 집 대문 문턱을 겨우 넘어 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 아버님이 매일 마을앞 개울에 나가셔서 개구리를 잡아 구어 주셔 맛있게 먹었던 일도 회상하곤 했다. 아버님은 내가 어린 딸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갑자기 뚱보가 된 나를 보시고 매우 흐뭇해 하셨다고 한다.

나의 아버님은 1898년, 이조말엽에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는 진사를 지내셨고, 밀양산외면 지역에 넓은 땅을 가지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서당에서 아버지가 과거시험 공부를 하고 계실 때 한일합방이 되었다. 그러니까 아버님은 평생 한문만 읽고 쓰시다가 세상을 떠난 분이시다.

나 역시 초등학교 입학 전에 천자문을 외웠다. 아버님은 매일 저녁 동네 청년들을 모아 한문을 가르치고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해주셨기 때문에, 사랑방에는 언제나 서당학생들로 가득했다.

초등학생이 된 이후에도 나는 그 자리에 끼일 수가 없었다. 아버님은 유교사상이 몸에 배이신 분이라, "남녀칠세부동석"이라시며 동네 청년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반대로 어머님은 막내딸로 고생을 모르고 자라셨는데, 시집오신 후 시부모님과 남편을 모셔야만 했고,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문객들 뒷바라지 하시느라 한번도 다리를 쭉 펴고 주무신 일이 없었다 하신다.

어머님은 집에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지었으나, 일꾼 삯과 우리의 교육비를 지불하고 나면, 보리가 익기 전에 쌀독바닥이 훤히 보였던 해도 있었다.

나는 도보로 8km 떨어진 밀양여자중학교를 다녔는데, 종종 학교에서 보리밥 도시락을 보이기가 부끄러워 점심을 굶을 때가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양지쪽에 서서 먼 하늘만 바라보다가 교실로 들어가곤 했는데, 그때 찔끔찔끔 눈물을 흘린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하니 보리밥과 열무김치는 일류 메뉴였는데도 말이다.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은 친구들은 부산이나 대구의 일류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과외를 받고 있었지만, 우리 집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많이 울었던 일이다.

"간호부 안 맞으니 시집이나 가라"
 
그러던 중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불러 도움의 말씀을 주셨다. "네가 진학을 못하고 집에 있는 것은 네 머리가 아까우니 학비가 없는 간호고등학교에 원서를 한번 내 보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전교생이 예방 접종을 받았던 날의 기억이 났다. 나는 뒷줄에 서서 겁이나 덜덜 떨었고, 내 차례가 왔을 때는 가슴이 덜컹했던 기억이 나자, 간호사직은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었다. 그 날 저녁 아버님 방으로 내려가 간호학교를 지원할 의사를 말씀드렸더니, 아버님은 당장 "간호부 직업은 너에게 적합하지 않으니, 집에서 가사일이나 돕고 글공부(한문)나 배우고 있다가 좋은데 출가나 하라"고 하셨다.

나는 윗방으로 올라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간호학교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가끔 중학교 시절을 회상해보면, 그때 담임이셨던 신준성 선생님이 떠오르고 한번 뵙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사진> 독일에 가기 전 간호학교 학생시절 찍은 사진. 사진 오른쪽이 필자.


"미스 안 이러지 말고 외국으로 떠나요"
 
간호학교를 졸업한 후 밀양보건소에서 일을 하고 있던 66년 2월, 동료들 사이에 '파독간호원 모집'이란 신문광고가 가장 큰 화제였다.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엄 간호사는 30대 후반의 서울출신인 기혼녀였는데 상당히 멋진 분이셨다.

그날부터 그분의 아침인사는 "미스 안 이런 곳에 있지 말고 외국으로 떠나요. 당신같이 젊은 나이에 무엇이 걸려서 못 떠나요?" 이었다. 그녀는 가정에 매여 있지 않은 나의 젊음을 항상 부러워했다. 내가 독일행을 결정하고 서울에 다녀오니, 그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나는 영결식에 참여하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고, 고국을 떠난 오랜 날까지 나의 가슴에 맺혀 잊혀지지 않았다.

66년 10월 15일, 나는 독일에 도착했다. 내가 배치된 곳은 하노버에서 80km떨어진 베르덴이란 조그만 시였는데, 그곳으로 한국간호사 4명이 함께 왔다. 그 날 오후 6시 하노버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베르덴 시립병원 간호원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동료 간호사 권장에 독일행
 
독일 북쪽인 이곳은 산이 없고 큰 숲들이 많은 지역이다. 그 날 저녁, 차가 끝없이 어두운 숲 속을 달리고 있을 때, 나에게는 이 사람들이 우리를 어떤 숲 속 아니면 촌구석으로 데려가 어떤 일을 시키려 하는가 하는 공포심과 좌절감마저 들었다.

이런 우리들을 한번씩 뒤돌아보며 던져 주던 간호원장의 미소도 나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있는 병원은 병동마다 수녀들이 수간원직을 맡고 있었는데, 간호사들에게 권위적인 태도가 심했다.

내가 해도 좋은 일에 한계를 지웠고, 언어소통이 어느 정도 될 때까지 투약도 허락하지 않았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한국간호사들은 한방에 모여 서로의 체험담을 나누었는데, 낮선 이곳 사람들의 흉내도 내고, 한계가 있는 우리의 업무에 대해 불평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처음 내가 배치된 병동은 외과의 남자병동이었다. 나의 일은, 거동할 수 없거나 거동이 금지된 환자들을 씻기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자 환자들의 웃옷을 벗기고 몸을 닦는 일은 당시 나에게 무척 쑥스러운 일이라, 가능하면 다른 일을 맡아서 했다.

어느 날 아침, 교통사고로 다리에 깁스를 한 새 환자가 입원했는데, 키가 너무 커서 발쪽 침대칸막이를 떼어 내고 두 다리를 밖으로 쑥 내놓고 있었다. 세수를 시키려고 물을 떠놓고 침대 옆에 서서 한참 그 환자를 살피다가 용기를 내어 도대체 키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당신은 키가 몇 km나 되나요?" 환자는 싱긋 웃으며 나를 한참 보더니, "자동차로 가면 한 5분쯤 걸립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병실의 모든 환자들이 웃기 시작했다. 그 환자의 엉뚱한 대답에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당황하여 병실을 나와 수간호원 방으로 달려가, 남자병동에서 일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니 여자 병동으로 옮겨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래서 내과 여자병동으로 옮겨졌다. 당시 나는 언어소통이 어려워 언제나 긴장된 생활이었고, 혹시 한국간호사 이미지를 손상시킬까 하는 지나친 걱정도 많이 했었다. 병실에는 비만증으로 인한 신장병, 당뇨, 뇌졸중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두 번의 전쟁을 겪은 독일인들은 60년대 경제의 부흥기를 만나, 먹는 것에서 큰 즐거움을 찾았다. 시내에 쇼핑 나가서 뚱보 독일인을 보고 입이 딱 벌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는 작은 도시에 동양인이 없었음으로, 독일인들도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우리들은 서로 사람구경을 한 셈이다. 체격이 크고 비대한 환자들을 침상에서 씻기는 일은 너무나 힘이 들었고, 여자 환자들은 전신목욕을 시켜야 했었다. 가끔 환자 다리를 내 왼쪽 어깨에 얹고 닦기도 했는데, 이런 나를 보고 독일 간호사들은 배를 쥐고 웃었다.

그래서 아침 침상정리까지 끝내고 나면 왼쪽 어깨는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한국간호사들은 환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지만, 그로 인해 독일간호사들과 종종 갈등을 겪어야 했다. 독일 간호사의 일반교육수준은 한국에 비해 훨씬 낮았다.

내가 있었던 시립병원에는 중학교를 졸업한 간호사가 드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직업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었고, 매우 성실했다. 처음에 나는 천천히 걷고 병실 일을 빨리 처리 못한다고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았다.

일이 너무 힘들 때는 직원화장실에서 잠깐 앉아 쉬거나, 집에서 온 편지를 읽고, 또 울기도 했다. 화장실은 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힘들 땐 화장실서 쉬거나 울어
 
파독 2주일째의 휴일이었다. 아침 일찍 누군가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안 간호사 빨리 병동으로 좀 내려와요." 독일인들은 이빨이 좋지 않아 젊은 나이에 틀니를 한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단 음식을 많이 먹고 생식을 거의 하지 않는 데서 온다. 틀니는 잠자기 전에 빼서 물에 담아 두는데, 중환자의 경우 간호사들이 그 일을 해야 했다.

나는 한국에서 틀니를 본적도 만져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이일은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는 일보다 더 내 비위에 거슬렸다. 나는 빨리 병실 일을 끝내기 위해, 4명의 환자들의 틀니를 큰 통에 넣어 배설물 처리실에 갖다 놓았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당번이 이것을 발견하고 소동이 난 것이었다.

근무를 나온 간호사들 중에는 내게 화를 내는 이도 있었고, 눈짓을 해가며 뒤에서 킬킬대며 웃는 이도 있었다. 나는 잘못했다는 말만하고 슬쩍 자리를 빠져나왔다. 환자들이 자기 틀니를 찾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이일은 뒷날까지도 웃음을 자아내는 화제가 되었다.



<사진> 필자가 근무하는 레이저과 수술실


여성의 지위·권리에 눈뜨고 보니...
 
어느 날 오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베를린에 여성모임이 있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는데 함께 한번 가보자는 권유였다. 친구의 말로는 여성모임은 커피나 마시면서 잡담하는 곳이 아니며, 정치운동, 여성운동을 하는 단체로 아무나 쉽게 가입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와 한번 가서 눈치를 보자는 약속을 했다. 첫날 느낀 분위기가 나의 취향에 맞아 지금까지 회원으로서 몸담고 있다. 내가 여성모임에 가입했을 때, 구성원은 거의
간호사였고, 조직의 기반이 단단하였으며 그 기능이 활발했다.

한국의 70년대는 공업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여성노동자의 권리가 형편없이 탄압되고 있었다. 재독한국여성모임은 한국여성노동자의 작업시간 및 작업시설 개선과 임금인상 그리고 노동조합 합법화를 위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운동에 연대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뒤이어 광주항쟁이 일어났고, 재독한국여성모임은 국내, 해외 민주화운동단체와 연대하여 시위운동, 공개행사, 서명운동 그리고 문화운동을 통하여 독일사회에 이 문제를 알렸고, 또 한국에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독일정부기관에게 협력을 요구하며 우리의 작은 투쟁을 벌려 왔다.
 
재독한국여성모임서 '역사 안목' 가져
 
나는 여성모임에서 정기적인 세미나를 통해 우리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제3세계 여성들의 운동, 2세 교육문제 등 함께 배우고 토론할 많은 기회를 가졌다.

나에게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 위치에 대한 의식이 단단히 다져진 해는 86년이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기생관광' 실태조사 보고서와 여성의 전화에서 발표한 공개토론 보고서 '인신매매와 매춘여성'을 내 손에 들은 때다.

박정희 정권이 조국 근대화와 외화획득을 위해 관광산업을 국가의 3차 산업으로 정했을 때, 정부의 적극적 지원과 특혜로 매춘관광이 등장하게 되었고, 관광사업은 주로 일본 관광객을 상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79년 관광수입이 3억2천6백만 불이나 되었다.

그 당시 독일신문에서도 이것에 관한 기사를 읽을 수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귀한 딸들을 팔아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은 여성을 모독하는, 아니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때 나에게 주어진 첫 과제가 여성권익을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후 베를린 지역모임은 베를린 일본여성회와 '기생관광'을 테마로 세미나를 가졌다. 뒤를 이어 88년, 일본 여류 미술가 타에코 토미야마(Taeko Tomiyama) 여사가 베를린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그린 그림전시회와 슬라이드를 일본여성회와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것을 계기로 우리는 일본 여성회와 10년 동안 정신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고, 도쿄 '2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과 2001년 덴마크에서 열린 국제법정에도 참석을 했다.

나는 지난 3월 8일 '세계의 여성의 날' 행사에 참석하면서 독일에 있는 여러 여성단체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이란에서 망명을 온 여성들이 모인 단체였다. 79년 국왕 팔레비 정책에 반대운동을 하던 남편이 감옥에 있거나 또 가족을 등지고 이곳으로 온 여성들이다. 이곳 독일에 온 후 남편이 사형을 받은 여성도 있다.

종교와 정치를 분리 못한 정권아래 여성들은 이중적으로 탄압되는가 하면, 여성들의 활동이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다처 가부장제도가 인정되고 있는 나라에서 여성권익 주장을 하다 몰매를 맞는다는 이야기를 그들과의 만남에서 들었을 때, 또 다른 사회구조 속에서 받는 여성들의 고통을 알게 되었다.

나는 비민주적인 한국 정권과 유교사상 아래 끝없이 억압당하다가 외화획득을 위한 인력으로 이곳에 왔다. 그 당시 독일에서는 간호사 부족으로 병원경영에 위협을 받고 있을 때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과제인 독일인의 건강을 위해 성실히 직무를 수행한, 당당한 이 사회의 일원이다.

기생관광·위안부 문제 팔걷어 붙여
 
통독 13년을 맞이한 지금, 독일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 시대의 부정적인 사회 흐름을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볼 수 있었다.

독일에는 정치적 극우파들이 늘어났고, 지방의회 중에는 극우파 당원들이 의원석을 차지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이곳의 소수민족, 즉 이주민과 피난민 그리고 망명자들은 직간접으로 탄압을 받고 있다.
이런 현실에 당면해 있는 재독한국여성모임은, 이 사회에서 우리들의 과제가 무엇인지 또한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민주주의 국가인 독일에서 살았고, 또 이곳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자세에 대한 것도 내 몸에 담게 되었다.

또한 내가 독일문화권에 살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점은, 내가 설 수 있는 자리, 즉 나의 삶은 나의 인생관에 맞게 꾸려 나갈 수 있는 사회라는 것, '나'란 개인의 영역이 분명하고 침해를 받지 않는 것 등이다.

내가 어떤 옷차림으로 다니던, 혼자 영화관이나 전시회를, 산보나 또는 여행을 가던, 언제나 마음이 자유로운 것이 이 사회의 기본 성격이다. 그래서 독일에서 문학가나 음악가가 많이 나오지 않았나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해본다.

어느 사회에서나 이주민에게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이사회의 일원으로 나의 몫을 하면서 살았고 또 살아갈 것이다. 내가 한국인 혹은 독일인이라는 개념을 떠나 한 우주인으로 살면서, 독일은 내가 몸담고 있는 한 사회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이 사회 속에서 나는 무엇에 기여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가지게 된다.



<사진> '공장의 불빛' 연극 공연중인 베를린 지역 '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들


피눈물나는 삶, 인연·용기...
 
【독일】나는 독일에 온 1966년부터 계속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한국 유학생과 인연을 맺어 결혼하여 남매를 낳았고, 생활을 꾸려 나가야 했기 때문에 임신 중에도 쉴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아빠가 대학과정을 끝낸 후 우리는 헤어졌고, 당시 큰애가 8살, 작은애가 겨우 첫돌을 지났다. 몇 년 동안 홀로 어린 남매를 키우며 보낸 생활은 피눈물이 얽힌 나의 삶이었다.

새벽부터 아이들을 깨워 유치원에 맡기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서 직장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많이도 울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지워 버리질 못해 가슴에 항상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작은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지금 나와 함께 삶을 나누고 있는 독일 분을 만나게 되었다.

이분은 나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한 여성으로서, 이주민으로서 이 사회에서 권리를 찾는 의식화에 많은 힘을 보태 주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독일에 와 동생들의 학비를 부쳐 주어야 했고, 결혼 후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으니, 젊은 시절 나는 자신을 망각하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그이 조언에 '아비투어' 입학
 
나는 종종 그에게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릴 때 배움의 한을 더 늦기 전에 풀도록 하라는 그의 조언에 용기를 얻어, 나는 야간고등학교에 들어가 아비투어(대입자격)과정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큰애가 17살 작은애가 10살 되던 해로, 내 나이 이미 45세였다. 그 동안의 아이들 뒷바라지는 그이가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나의 근무시간을 한 달에 열흘로 줄였다. 며칠 후 그이와 함께 학교를 찾아가 입학절차를 밟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랫동안 움츠리고 있던 긴장감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마음이 한없이 푸근해졌다. 이것은 남녀사이의 애정을 뛰어넘는 깊은 이해와 믿음에서 우러난 껴안음이었다.

이곳 야간학교의 아비투어과정은 예능과목이 없을 뿐 주간학교와 같다. 내가 10학년으로 들어갔을 때 6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는데, 통독이후 동독에서 고등학교과정 12년을 거친 학생들이 중간에 많이 들어와 1백여명의 학생이 함께 졸업하였다.

야간고등학교의 입학조건은 중학교(10년)과정 후, 최소한 3년 간 직업경력이나 직업학교(3년)를 나온 자에 해당된다. 즉 양노, 건강, 실업 보험 등, 독일의 의무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다. 고등학교 졸업 2년 전, 그러니까 11학년 때 아비투어 시험응시과목을 선정해야 했다.

나는 수학, 화학, 영어와 정치역사를 선택했다. 수학, 화학 반에는 2/3이 남학생들이었으나, 대부분 학생들은 나를 제 또래 학교 친구마냥 수업시간에 이해 못한 점들을 언제나 성의껏 가르쳐 주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앞쪽에 앉은 19살 남학생이, 어머니 생일이 모레인데 무슨 선물을 하면 좋겠느냐고 급한 맘으로 물어 왔다. 내가 그의 어머니 나이를 물으니, 많이 늙은 여성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어머니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나의 아들이 4, 5살 때 하는 말이, 엄마하고 꼭 결혼을 하고 싶지만 너무 나이가 많아서 싫다는 이야기를 하던 것이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나의 학교친구들은 내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그저 편하고 믿음직한 친구로 나를 대했다. 가끔은 내 나이에 맞지 않는 일들도 함께 해야 했지만, 내 나이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4년 동안 젊은 세대의 학생들과 어울려 카페와 맥주집,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함께
했다. 다음날 근무 때문에 수업이 끝난 뒤 곧장 집으로 가려하는 나를 친구들은 종종 커피숍으로 끌고 갔다.

뒤늦은 학업, 시련과 기쁨
 
테마는 주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었지만, 우리는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직장생활을 경험했기에 성숙한 인간관계를 원했고, 함께 수업을 받는다는 공동의식이 있었다.

나는 과목중 독일어의 문학 분야를 좋아했다. 독일어 선생님은 언제나 나의 시험 답안지는 전체적인 내용은 좋으나, 문장구성에서 틀린 점들이 많아 점수를 잘 줄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항상 서술시험지는 반으로 접어 왼쪽엔 답안을 적고, 오른쪽은 선생님이 빨간 펜으로 틀린 곳을 수정해 주었다. 나의 답안지는 늘 빨간색이었다.

하지만 수업중의 발표 등을 고려하는 구술점수는 좋았다. 그래서 독일어는 겨우 낙제를 면한 셈이다. 학교 졸업 2년 후 우연히 지하철에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나를 껴안고 반가워했다. 독일어 선생님은 내가 인격적으로 존경한 분이었다. 우리들은 삶 속에서 인연을 맺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재회의 기쁨은 언제나 특별하다.

독일의 여러 단체의 모임에 참석해 보면, 조직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자세, 즉 조직원으로서 의무와 권리에 대한 의식이 뚜렷하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은 교육과정에서 아이들에게 자기의사를 표현하고 토론할 수 있는 학습을 철저히 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시험이 거의 다 주관식이다. 내가 한국을 떠난 지가 오래고, 모국에도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을 미디어를 통해 알고 있지만, 나는 나의 삶을 사는데, 아니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는데, 독일에서 받은 4년의 학교과정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것은 도전, 시련 뒤에 느끼는 기쁨이기도 하다.

그 후 나는 2년 동안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일현대문학, 그리고 훔볼트 대학에서 한국학을 공부했지만, 직장생활을 계속하던 나에게 시간적 여유가 없어져 일단 중단했다. 퇴직 후 하던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다.



<사진> 풀에 덮힌 이 주택은 베를린 노이쾰른 지역에 있는 필자의 집


된장찌개 좋아하는 그와의 20년
 
내가 하인츠 맥클러씨를 만난 때는 83년 정형외과 수술실 마취과에서 일하고 있을 때이다. 수술실에는 나와 또 한분의 한국인 간호사가 있었는데, 그이는 유달리 우리들에게 관심과 친절을 베풀었다.

당시 나는 애 아빠와 헤어지고 혼자 있을 때로, 내 생활에서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종종 그이에게 문의하거나 도움을 청했다. 예를 들면 추운 겨울날 자동차 시동이 안 걸려 도움을 받은 일, 또 그 일을 하면서 동시에 아이들을 혼자서 키우는 과정에서 겪어야만 했던 많은 어려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조언을 얻는 기회를 여러 번 가졌다. 나는 그이와의 대화 중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의식과 또 내 마음을 열 수 있는 용기를 배웠다.

어느 날 그이는 나에게 음악 카세트 몇 개를  선물했다. 카세트 음악은 1968년 독일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록그룹 '톤 슈타인 쉐르벤'(Ton Steine Scherben)이 불렀던 노래들이다. 그 당시 독일자본주의를 비평하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와 독일의 보수적인 가정문제, 보수적인 학교교육 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 과격하게 지적하는 노래의 가사는 아주  무정부주의(arnachism)적이었다.

'68세대' 하인츠 맥클러씨 만나고...
 
67년 팔레비 국왕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미국을 지지하는 당시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정책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에서, 한 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그 후 학생운동은 더 과격하고 넓게 전개되었다.

이 운동이 독일사회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은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지금의 녹색당원들은 '68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날 책을 빌리기 위해 그이 집에 들렀을 때, 그의 방 벽의 반을 차지하는 큰 모택동 사진을 보고 나는 놀랐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과 그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는데. 그는 그냥 싱긋이 웃고만 있었고, 나 역시 그 사진에 대하여 더 묻지도 않았고 몇 권의 책을 빌려 집으로 왔다.

뒷날 '68학생운동' 때 이곳 사람들에게 모택동은 중국혁명을 한 영웅으로 상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모택동은 인간역사에 남은 영웅이라 생각을 한다.

그 후 일 년 동안 나는 그이와 밖에서 만남을 가지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함께 이사를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나무와 잡초에 덮여있다. 풀이던 꽃이던 절대로 뽑지 못하게 하는 그이의 의견에 처음 얼마동안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이젠 풀에 덮여있는 우리 집이 퍽 평화롭게만 느껴진다.

집과 정원을 가꾸지 않는다고 참견하던 이웃집 사람들도 이젠 더 간섭을 하지를 않는다. 많은 독일사람들은 정원에 잡풀 한 포기 없도록 매일 가꾼다. 그래서 우리 집을 찾기란 퍽 쉬운 것이 우리 동네에서 나무와 풀에 얽혀있는 집만 찾으면 된다.

내가 사랑하는 그이는 '68학생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베를린 자유대학의 의과대학 학생이었다. 부모님께 생활비를 받아 절반은 운동비에 쓰고 돈이 모자라서 대학식당에서 제일 싼 음식을 사먹거나, 쌀을 사다가 우유를 넣어 끊여먹는 것으로 배를 채웠다고 한다. 대학 강의도 빠진 날이 많아, 겨우 학점을 얻어 졸업을 했다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은 응급수술실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집에서의 어느 날, 그이는 모택동 사진을 꼭꼭 접어서 궤짝에 넣어버리고, '톤 슈타인 쉐르벤'음악을 듣고 앉아있었는데, 그의 눈가가 젖어있었다.

함께 가자던 동지들도 뿔뿔이 헤어진 지 오래고, 그때 정부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젠 출세의 길에 올라 그 주먹을 국민을 향해 내보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모택동 사진' 치우고 울던 그...
 
나는 그때 아무 말 없이 그를 내 가슴에 꼭 안았다. 이렇게 그이와 삶을 나눈 지가 20년을 맞이한다. 주위의 친구들은 왜 결혼을 안하느냐고 종종 물어온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아니 이사회가 만들어 놓은 계율에 나는 묶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떠날 수가 있어 자유롭다.

나는 생선이나 고기류를 전혀 먹지 않는 그이와 함께 먹기 위해 종종 된장찌개를 한다. 이곳의 잘 익은 치즈냄새는 된장과 비슷하다. 단백질이 많은 음식이라면서 그이는 언제나 즐겨먹는다.

그는 종종 "미국에서 수확되는 콩과 곡식들을 소를 먹이지 않고 사람들이 나눠먹는다면 이 지구상에는 굶는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그이가 고기를 안 먹는 이유 중 하나다.

아이들이 자기의 삶을 찾아 집을 떠났고, 그들의 방도 텅 비어 있다. 하지만 이젠 나는 사랑하는 아이들의 텅 빈 방을 다시 사랑으로, 믿음으로 꼭 꼭 채워야겠다.



<사진> 2000년 고국방문했을 때 하인츠 맥클러(맨 오른쪽)씨와 언니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필자는 오른쪽에서 두번째)


베를린지역 병원개혁과 나...
 
독일에 온 후 처음엔 서독에 있는 작은 시립병원에서 3년을 일하다가, 결혼 후 아이들의 아빠 대학등록 문제로 나는 첫아이를 데리고 베를린으로 이사를 했다. 계속 간호사직에 종사하면서 여러 분야의 간호지식을 얻기 위해 외과, 내과, 부인과 병동을 거쳐 마취과, 정형외과 수술실에서 20년을 일했고, 지금은 레이저과 수간호원으로 있다.

레이저 치료기술의 발달에 따라 독일에서도 5년 전부터 지금 근무하고 있는 시립병원에도 레이저 전문과를 설치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이렇게 완전한 시설과 전문의들이 있는 곳은 아직까지 없다. 그래서 이 병원으로 유럽 내 여러 나라에서 환자들이 찾아오고, 의사들을 위한 레이저교육을 매년 4회 실시하고 있다.

나는 환자간호를 위한 일 외에, 레이저과의 심포지엄에 딸린 기획을 해야하는 등 언제나 일과가 분주하다. 내가 수간호사자격을 얻기 위해 일년 동안 교육을 받고 있었을 때, 내 나이가 55살이었고, 아비투어과정 때처럼 또 젊은 사람들 속에 끼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간호사직은 생활을 위한 직장이었고, 분주하게 열심히 활동한 분야는 직장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나는 독일의 간호사 관련법규나 현 독일 간호사에 대해서도 너무나 몰라, 어떤 때는 정말 민망할 때도 있었다.

사회운동 하느라 늦은 수간호사 진급...
 
대부분의 사람은 직업을 가지면 그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넓히고, 또 진급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나는 그동안 간호지식은 많이 쌓았지만, 나의 맡은 임무에만 충실했지, 직장에서의 나의 위치라든지 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말하자면 여성모임의 활동 같은 사회운동에 참여하는데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투자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새롭게 나의 직업의식에서 부족한 부분을 부지런히 보충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 새삼스럽게 내 직업에 대한 자의식을 갖게 되었고, 지금은 나의 직책에 대한 흐뭇함을 느낄 때가 많다.

세계화의 여파와 그것에 따른 운영의 효율성에 대한 요구로 독일에서는 몇 년 전부터 병원의 개혁이 대폭적으로 진행 중이다. 베를린에서는 98년부터 시립병원마다 간호사취업의 길이 막혔다. 지금 내가 있는 병원에도 매년 20명의 간호학생들을 배출하지만, 한 명도 고용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대부분이 베를린을 떠나 서독지역이나 스위스 등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 일하는 간호사 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베를린의 간호사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베를린 시의 악화된 재정관계로 병원을 더 이상 운영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0년 1월에는 10개의 베를린 내 시립병원들이 하나의 합자회사로 통합되었고, 시의 병원 수를 줄이는 동시에 내부적인 개혁이 크게 진행 중이다. 병원 당국에서는 퇴직연령에 가까운 간호사들에게 명예퇴직을 권하는 등 간호사 수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공립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의 강제퇴직은 현재의 법규로는 불가능하여, 그래서 이 법을 2006년까지만 유효하게 하는 새 법안이 마련되었다. 현재 독일간호사들이 직장을 못 구하고 있고, 2003년까지 지금 간호사수의 20%를 줄이지 않고는 병원의 운영이 불가능하다니 앞으로 과격한 인사이동과 내부개혁이 있을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간호원들의 과제는 점점 늘어난다. 병원의 내부 움직임을 파악하고 밑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잘 이끌어야만 하는 중요한 과제가 언제나 뒤따른다. 매달 직원회를 열어야 하는 것은 병원방침에 의한 의무이며, 나는 언제나 기꺼이 이 일을 진행한다.

직원회의는 투명한 업무를 꾸리기 위한 것이다. 레이저과 내에서 매주 열리는 회의에서 모든 정보를 전함으로써 병원의 새로운 시스템에 모든 직원들이 발맞추어 함께 변화, 발전하도록 해야한다.

바쁜 나날에도 문득 고국생각에 눈물

 
수간호원들마다 직원을 이끌어 나가는 자신 만의 고유한 스타일이 있다. 언제나 내가 강조하는 점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들이며, 그들의 건강회복을 위해서 서로가 협력하는 공동작업의식을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우리들이 목적이요 의무라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배운 간호사 정신, 즉 나이팅게일 정신은 이곳 유럽에서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환자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갔을 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재활간호에 목적을 두고 있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서 독일간호사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야 한다는 많은 논란이 있었고, 미국, 유럽 등에서 발표된 간호사들의 연구논문이 독일에 있는 간호사들에게도 많이 읽혀지고 있다. 수술실, 마취과, 중환자병동과 위생과 등 전문과정을 수료한 간호사수가 늘어나고 간호사를 위한 경영교육의 시스템이 많이 설치되고 있다. 곧 독일간호협회가 설립될 것이며 그를 중심으로 각 지방에도 설치될 예정이다.

현재 독일의 여성 정년퇴직은 63세, 남성은 65세이다. 정년퇴직을 아직 몇 해를 앞두고, 내가 맡은 직책에 어려움 없이 엮어 가는 일은, 그때까지 나의 에너지를 어떻게 나누는가에 달려 있다.

젊은 동료들과 함께 배우고, 좀더 인간다운,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분주한 일과를 보내고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며 푸른 하늘과 맑은 계곡이 있는 고국을 눈앞에 그리니, 갑자기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것은 시련을 넘은 뒤에 오는 외로움이고 기쁨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