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기대 속 셋째 딸로 태어나...
조국남(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보면 거의가 남자라 짐작을 해서 그런지 나는 가끔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국 공관에서 보내오는 우편물의 수신인 난에는 아주머니(Frau) 대신 아저씨(Herr)란 호칭이 딸려 온다. 한국 사람들도 이러한데 하물며 한글이름자가 풍기는 울림이나 뜻에 서투른 독일사람들이야 어떠하랴.
이곳 독일 관청에서도 일반적으로 외국인의 이름에서 남녀의 성구별이 어려우면 우선은 남자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은 남성중심시대의 산물로, 아니면 현시대의 산 증거로 봐야 할까?
자녀들은 자라면서 대개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한다.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만큼 그 기대에 상응하는 자녀노릇을 하기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얼마만큼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가 독일에 와서 산 지 삼십여 년이 지났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내가 독일에 온 것도 내 이름과 관련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방울처럼 울리는, 단정하고 가냘프고 우아한 여성적인 이름이 내게 지어졌다면 나는 혹시 다른 삶을 꾸려갔을까?
'날아오르는 원앙' 태몽 뒤 탄생
무엇 때문에 나에게 사내이름을 지어 주셨냐고 언젠가 한 번 여쭤보니 어머니는 내 이름을 지을 때의 기억마저 어두우셨다. 내 짐작으로 부모님은 남동생을 보라고 나와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일부러 남자의 이름까지 지어 주셨으나 내 아래로도 계속 딸을 보셨으니 내 이름은 그저 소원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 막내가 아들이어서 내 여동생 순남이와 나는 우리 이름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수(?)한 셈이다.
이름에 얽힌 일을 하나 더 말해보자면, 내가 어릴 적엔 라디오조차 귀했다. 여름날 저녁이면 이웃집에서 우리 동네에 하나 뿐인 라디오를 확성기에 연결시켜 길가에 내 놓아서 온 동네사람들이 들마루에 둘러앉아 일일연속극이나 중계방송을 귀담아 듣곤 했었다.
그 때 한국남 박사가(진짜 박사였다) 진행한 퀴즈방송이 한 동안 매우 인기가 있었는데, 그 분 이름 덕분에 내가 종종 조국남 박사로 불리는 대우를 받았으니 남동생을 하나밖에 보지 못한 명분을 한 동안 그 '동명이인' 박사로 세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머니를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이다. 이야기 중에 "니는 남자로 태어나야 했었는데..." 하신다.
"무슨 말씀이세요?"
"자식 여럿을 낳아 키웠으나 태몽은 니 오래비 둘과 니를 뱄을 때 그렇게 꼭 세 번 꾸었다. 그래서 니가 사내아이로 태어나리라 기대하고 있었지. 니한테 태몽이야기 안 해 주었더나?"
"아니요, 처음 듣는데요."
"내가 저 넓은 들판에 나가서 연을 날리고 있었단다. 연줄 끝에는 원앙새 한 쌍이 달려 있었는데 얼레를 돌려가며 풀고 또 풀어도 연줄이 한없이 풀려나가 원앙새들이 하늘 꼭대기로 가마득히 날아오르는 꿈이었단다. 그래서 니 평생 니가 그렇게 비행기를 많이 타는 모양이다."
내가 비행기를 자주 타야한다는 대목에서 어머니의 음성이 잠긴다. 나는 속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기차로도 갈 수 없는(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먼 독일에서 살고 있음에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여 다시 독일로 떠나오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엄마, 나 독일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염려 마세요. 그리고 그 높이 올라가는 연줄을 잡고 있으면 힘드실 텐데 그만 놓으세요."
"야는, 뭐라카노. 내가 그 연줄을 놓은 지가 언젠데 그카노. 니가 태어났을 때 탯줄 끊으면서 벌써 손에서 다 놨다."
"아니 그렇다면 제가 아직도 그 연줄을 붙들고 있다는 뜻이예요? 그럼 이제 제가 연줄을 놓을게요." 모녀간의 마지막 대화였다.
이름 탓에 툭하면 남자 취급
어머니가 내 이름을 지을 무렵의 기억이 어두우신 데는 까닭이 있다. 내 바로 위의 언니가 세 살이 되던 해에 홍역을 치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 당시 나를 배어 만삭이던 어머니는 넋을 잃고 방안에 앉아 있었는데 그 날 저녁 산기가 사르르 돌기 시작하여 밤을 샌 후 새벽녘에 몸을 풀었다고 하셨다.
"윗목에서는 니 형이 죽어나가고 아랫목에서는 니가 태어났으니 니한테 젖 물리면서 아이 잃은 설움 다 삭였더니라. 팔 남매 중에서도 어쩌면 니 때에 젖이 그토록 많았는지
모르겠다."
젖먹이 아기는 품에 안겨서 어머니의 젖을 꿀꺽꿀꺽 잘도 빨았으리라. 덕분에 자라면서 나는 늘 건강했다. 어머니가 삭이는 깊은 슬픔도, 소리를 죽인 통곡도 젖줄을 통해서 꿀떡꿀떡 삼켰으리라.
그래서일까? 나는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 어머니가 슬픔에 젖지 않고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젖먹이의 선서'라도 한 듯,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고, 집안 일 도우면서 끊임없이 어머니를 배려하는 착한 딸로 자랐다.
'아들노릇' 하려고 독일로 오다...
내가 간호고등학교로 진학한 직접적인 동기는 직업을 배워서 직장을 얻게 되면 경제적으로 기울어진 집안을 속히 일으켜 세우는 데 애쓰는 어머니를 도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진로의 선택이 경제력의 확보 뿐 만 아니라 직업여성으로서, 자주적인 삶을 갈망하는 여성으로서 나의 활동범위를 독일사회로 넓히는데 결정적인 도약대가 되어 주었음은 독일에서 십 수년을 지낸 후에야 깨달았다.
그 길을 택하게된 동기가 자의였건 타의였건 그 때 직업학교로 향한 나의 선택은 내 인생의 한 갈림길에서 "인문고등학교로 진학해서 대학을 나와서 좋은 신랑감을 만나 부자 집으로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복 많은 여자"의 길을 가지 않고 "직장 생활을 잘 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자기 아내와 경쟁을 하지 않는 남편을 만나서 아들 딸 낳아 가정과 탁아소와 직장을 누비는 팔자가 센 여자"의 길을 가는 선택이었다.
유럽여행이 너무 하고파 지원
여기에는 내가 딸이지만 아들만큼 잘 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세워보려는 나의 의지가, 아니 아들보다 오히려 더 잘 할 수 있다는 경쟁의식이나 나의 욕망이, 또는 부모의 은근한 기대에 맞추어서 인정받고 싶어 '아들노릇'을 하려는 나의 무의식적인 적응, 이 모두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믿는다. 그 길이 한국 땅을 넘어서 독일 땅까지 이어져 있으리라고 그 누가 알았으랴!
김천에서 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몇 몇 동기들과 같이 모교병원에 남아서 수술실 책임간호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서울의 국립 중앙의료원에 가서 6개월 간 마취사교육을 수료한 후 마취사의 일까지 겸했다.
그 다음 미래를 대비해서 양호교사 자격증도 땄다. 우리 집의 고정수입은 내 월급뿐이었다. 김천에서 태어나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김천을 떠나고 싶었으나 집안을 도와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계속 머뭇거렸다.
병원 측에서도 이것을 눈치채고 나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며 나를 붙들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 이미 독일로 취업간 선후배들의 소식이 병원으로 날아오곤 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계약 3년 근무를 마친 간호사들이 속속 귀국을 해서 독일 간호사 생활수준에 대해 들을 기회도 있었다.
독일 간호사들은 국제간호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낮은 수준이어서 간호원 경력에 쓸모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유럽으로 여행을 다닌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젊음을 담보로 한 용기가, 새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그리고 삼년간이라는 한정된 기간에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희망이, 유럽여행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나에게 손짓을 하며 나를 충동했다. 졸업 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같이 일하던 후배와 함께 독일로 가자고 결정하고 서울의 해외개발공사를 찾아갔다.
드디어 1970년 10월에 독일로 오게 되었다. 낯선 나라에 와서 우선 말이 통하지 않으니 지금까지의 나라는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농아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배우지도 않은 수화를 흉내내면서 학교에서 배운 영어실력으로 근무를 했다.
나에게 굳게 닫힌 이 사회의 문을 열려면, 그리고 독일에서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한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고 결심한 후, 기숙사의 독방에서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혼자 외운 단어를 다음 날 병동에 나가서 열심히 사용해 보았다.
한국 사전의 번역과 독일현지의 말뜻이나 용례가 틀려서 서로 오해도 했고, 원망도 많이 했으며, 웃음거리를 자아내기도 했다. 시간만 나면 같이 배정된 한국동료들끼리 모여 앉아 한국음식을 해먹으며 입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이질적인 생활문화를 몸에 익히며 소화시키느라 긴장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 사이 사이로 '낯익은 모습', '귀에 익은 말', '습관 된 익숙함'으로 향한 그리움이 애타게 파고들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아! 이게 바로 그 향수병이라는 게로구나.
향수병을 극복하니 힘 절로 솟아
그러면서도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렸다. 몇 날이 지났다. 몇 달을 채웠다. 그러다 어느 날 돌연히 깨달았다. 그렇게 낯설었던 분위기에 어느 새 내가 한결 익숙해져 있음을. 내 긴장감의 태엽도 다소 느슨해져 있음을.
독일말에 귀가 밝아오고 입도 점차로 트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해방된 자유를 맛보기 시작했고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서서히 찾기 시작했다. 나의 길이 독일로 연결되어 있었는가 보다란 생각을 했고, 젊은 나에게는 독일을 발판으로 해서 온 세계가 나를 위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유럽의 여러 나라로 여행을 다니고, 병원에서 같이 일하는 젊은 독일 동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수영을 배우고,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또 자동차운전도 배웠다. 힘이 저절로
났다. 마치 날개가 돋친 것 같았다.
결국 '뿌리가 끊어진 병' 걸리고...
제비뽑기 식으로 배정되었던 성 마리아 병원에서 3년간의 의무고용계약이 끝나자마자, 1973년 말 나는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내가 선택한 대도시로, 내가 선택한 직장으로 옮겨간 것이다.
수녀들 밑에서 시키는 일만 하다가 베를린대학병원에 와서는 팀 안에서 공동작업을 했다. 노조활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록 장벽에 둘러싸인 서베를린이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무한한 자유의 도시였다.
"언니야, 우리가 드디어 대학졸업하고 취직도 했으니 이제 언니가 공부할 차례야. 우리가 학비 도와줄게." 대학을 졸업한 여동생들이 제안을 해왔다. 마음이 뿌듯했다. 그 때까지 매달 집으로 보내던 송금을 중단했다. 근무시간을 줄인 후 베를린 콜렉(Berlin Kolleg, 대학수업을 위한 준비과정)의 야간부에 입학하여 낮에는 시간제로 근무하는 간호사로 저녁에는 학생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베를린콜렉'서 여성해방운동 심취
좌익 성향의 진보적인 교사들과 학교분위기, 수업방식에서 나는 3년 내내 자유로운 베를린 콜렉의 공기를 마셔가며 점차 자의식을 키우고 사회생활을 익혔다. 유엔에서 '여성의 해'로 선포한 1975년을 전후로 곳곳에서 물결치던 '여성해방운동'은 여러 학과의 주제로 선택되어 우리는 수업시간이나 휴식시간이나 자나깨나 '여성운동의 이론과 현실', '제3세계 여성운동'을 토론하며 흥분했고, 변화하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함께 휘말렸다.
지금까지 못 다한 일을 소급하여 단숨에 만회하려는 듯 그렇게 숨막히는 속도로, 그것도 모자라 몇 곱의 일과를 한꺼번에 해가면서 뱅뱅 도는 듯 살았다니! 여기서 이제 잠시 숨을 좀 돌려야 하겠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에게 현기증이 날 정도다.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더군다나 나는 만삭의 몸으로 졸업시험까지 치른 후 1977년 5월에 사내아이를 분만하였다. 어미가 그러했으니 하물며 뱃속의 태아는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아무튼 내가 그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는 아이가 태어난 후이다. 갓 태어난 아이가 갑자기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뺑뺑이판에 화살이 꽂혔다. 모든 게 일단정지 된 비상상태에서 아기의 건강회복에만 전념하며 기다려야했다.
아기가 건강해지자 이제는 내가 앓기 시작했다. 갑상선기능 항진증이었다. 갑상선호르몬이 과잉 분비되어 신진대사의 속도가 몇 곱으로 올라가 생기는 증상이다. 약물치료가 효험이 없을 뿐더러 기능검사수치는 감당을 할 수 없게 올라갔다.
내 몸 속에서도 드디어 난리가 난 것이다. 내 몸의 진동수가 엄청나게 높아지니 몸과 마음의 울림이 서로 어긋나버려 각각 제 마음대로 다른 궤도에서 돌고 있었다. 유원지에서 '비엔나 왈츠'라는 놀이기구를 타 본적이 있는가?
주치의사가 어느 날 나를 불렀다. 더 이상의 약물치료는 아직 젊은 나이에 위험하니 수술을 받으라고 권고했다. 한국사람에게는 아주 드문 병인데다 검사수치마저 그렇게 날뛰고 있으니! 당황하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의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의 병은 아무래도 '뿌리가 끊어진 병'(Entwurzelungskrankheit=실향민의 병)인 듯 합니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 말은 불화살처럼 내 가슴에 와서 명중을 했다. 그랬다. 나는 그것을 모른 척 하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여성들의 모임에 발을 디딘 곳도 역시 베를린인데, 1977년 가을에 '서로 돕는 여성회'에서 '국제결혼'을 주제로 세미나에 참석하면서부터이다. 그 곳에서 나는 오늘날까지 내 독일생활의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는 절친한 한국여성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미나가 열리던 주말에는 남편에게 젖먹이를 맡기고 오랜만에 한국여성들끼리 한국말만 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독일학교 친구들과 독일말로 토론한 내용을 한국여성들과 한국말로 토론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한국여성들과 한국적인 분위기에서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 것은 정서적으로 나에게 깊은 만족을 주었다. 내가 독일에서 낯선 세계와 친숙해지는 사이에, 낯익고 친숙한 한국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낯설어져가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초조함에 시달렸다. 상실감이 절망으로 나를 몰아갔다. 내가 두 세계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속 내 고향은 어딜까?
이듬해에는 내가 근무하는 베를린대학병원 앞에서 열린 '한국 간호원 강제송환 반대'를 위해 서명을 받는 운동에 나도 참가했다. 그 운동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78년 9월 재독한국여성모임의 조직체가 결성되었다. 그 참여과정에서 나는 이 독일사회에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모임을 통해 나는 나와 공통된 경험과 문제를 안고 있는 여성 동지들이 만나는 곳,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무엇보다도 우선 나의 정서적인 갈증을 해소해주는 샘터를 찾은 셈이다.
조직생활을 통해 나는 자신의 위치를 한국과 독일의 구조 속에서 다시 찾기 시작했다. 나는 여성모임의 회원들과 뭉쳐서 여성의 지위향상과 권익옹호를 위해 뛰어 다니면서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을 고양시키고 발전시켰다. 나는 여성모임에 기대기도 하고 비벼대기도 하고 원망도 하고 짜증도 냈다. 그러면서 나를 배워갔다. 나는 여성모임이란 평균대 위에서 연습을 하면서 독일생활에서의 평형을 찾아갔다.
"한국·독일 어디가 더 마음에 드나요?"
"한국하고 독일 둘 중에서 어디가 더 마음에 드나요?" 독일에서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자주 물어 온다. 간단하게 들리는 질문이지만 내가 독일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에 따라서, 내가 어느 길목쯤에 와 있는가에 따라서 대답하기가 복잡하고 불편할 때가 많다.
독일사회에서 한국계 이주민 여성인 나의 생활은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정신적 씨름의 삶이기 때문이다. 비교하기 어려운 두 세계를 두고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잣대로 저울질하다니! 그 얄팍함이 야속하게도 들린다.
그렇지만 독일에서 '친절하기로 알려진' 한국여성의 품위는 잃지 않는다. 내가 그럴 때를 위해서 대비한 '예의바르고 공손한' 한국여성의 대답중의 하나가 바로 "고향은 고향이지요"이다. 이렇게 답하면 물어 온 대부분이 표정과 몸짓으로 알았다는 표시를 한다. 그리고 더 깊이 파고 묻지도 않는다. 내 대답을 이해한다는 듯한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들의 고향이란 어떤 것일까 오히려 궁금해진다.
나에게는 무엇이 고향일까? 먼 지난 날 아버지가 "고향에 다니러 간다"하고 나서면 그 고향은 일가 친척들이 모여 사는 '산골'이었다. 아버지는 기제사, 봉제사가 드는 날은 빠짐없이 완행버스도 다니지 않는 산골로 걸어서 드나드셨다.
아버지의 다른 형제분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지내셨으나, 우리 아버지만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와 반세기가 넘게 객지에서 보내셨다. 내가 태어난 정든 고향 김천은 아버지에게 늘 타향이었으니 산골로 향한, 조상의 넋을 찾아가는 귀향 길에서 아버지도 나처럼 고향에 대한 생각을 하셨을까?
이제 그 분의 자녀 팔 남매 중에서 내가 혼자서 젊은 나이에 한국을 떠나와 삼십 년이 넘게 독일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가 고향 길 드나드시듯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한국을 자주 드나들었다.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 김천? 내가 "고향에 다니러 간다"고 나서면 우리 아이들은 내가 한국으로 갈 것이라 생각할까? 우리 아이들의 고향은 어디일까? 더구나 우리는 이사를 자주 다니지 않았는가?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은 베를린, 경상북도 김천, 칼스루에, 충청남도 예산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바트 메르켄트하임이다. 이제 아이들은 성장하여 집을 떠나 독립해 살고 있다. 여러 주거지 중에서 제일 오래 살은 이 소도시 동네가 그들의 정든 '고향'이다.
아이들이 고향이라고 찾아오는 이 동네에는 우리 집이 있고, 내가 주변의 지리에 익숙하고, 내 일터가 있고 또 우리가 잘 아는 이웃들이 있다. 그래도 독일 땅은 늘 소외감이 드는 타향이다.
그런데 내가 고향이라고 찾아가는 한국 땅은 또 왜 그렇게 낯이 설까? 내가 없는 동안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변화에 의해 나는 고향 땅에서 서툴기 짝이 없는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한국은 늘 소외감이 드는 고향이다.
"두 세계 모두 내 안에 있답니다"
독일의 우리 집 근처에는 넓은 들판이 있다. 이 들판으로 산책을 나가면 자꾸 김천에 있던 옛날 집 근처의 들판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들판은 지금 주택지와 고속도로에 밀려 사라진지 오래되었지만, 이곳 우리 집 앞의 들판을 질러 밀밭과 보리밭사이를 걷노라면 내가 어린 시절에 논둑과 밭둑사이로 뛰어다니던 바로 그 들판과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와 오늘의 내가 한 울림이 되고 한 마음이 되어 그 길을 걷고 있다.
모든 생물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이십여 년 간 자란 곳이 있다. 그리고 내가 부모님을 떠나와 삼십여 년 간 산 곳이 있다. 나는 이 두 세계에 다 속하면서,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에 속한다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 두 세계가 이미 모두 내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마음의 분열이 없이 이 두 세계의 울림을 분간할 수 있을 듯하다. 이제 내가 진정한 자주적인 삶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고 있나 보다.
<사진> 98년 여성모임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뒷쪽 오른쪽서 세번째가 필자.
손님 노동자'와 방문간호센터
복지국가인 독일의 사회복지제도를 살펴보면 다섯 분야에 해당하는 의무보험제도가 핵심이다. 즉 연금·의료·실업·산재 보험과 1995년부터 실시된 간병보험이 사회복지를 떠받드는 기둥들이다. 그 중 최근 실시된 간병보험은 노쇠, 질환, 정신박약 또는 신체장애에 의하여 가정에서 일상생활을 해나가는데 도움이 필요하거나 혹은 전문적 간호나 조치가 필요할 경우에 지원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보험제도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방문간호센터(Sozialstation)는 전문간호요원이 도움이 필요한 환자의 집으로 찾아가 출장간호와 자가치료를 해 주는 기관이다. 이런 기관이 있기 때문에 노약자들이나 홀로 사는 노인들이 노년에도 가능한 장기간 자택에서 지낼 수 있어 양로원의 생활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환자들은 병원치료를 피하거나 병원체류기간을 줄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방문간호센터의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직원은 20여명이다. 이 지역의 사방 팔방에서 요청하는 약 1백40명의 노인과 환자들에게 신뢰성이 있고 전문적인 간호와 조치를 할 수 있도록 직원들을 조직하고 일을 분담시키는 것, 방문간호센터의 일반사무관리와 직원관리 그리고 가정간호상담이 나의 주요과제이다.
'경영 간호'라... 장사꾼 되라고?
간병보험이 실시되면서 간호에 대한 인식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박애를 기반으로 전인간을 앞세웠던 간호의 개념이 경제성을 앞세운 경영학적 간호개념에 의해 밀려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 독일의 의료정책은 '인간적이고 전문적이면서 현 시대의 흐름에 맞는 경제적인 새로운 간호기술'을 모든 간호요원들에게 요구한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위기관리 연수에서는, 환자들이 이제는 환자이기 전에 기업의 수지결산을 좌우하는 고객임을 주입시킨다. 간호요원들더러 장사꾼이 되라는 소리다.
간호학교 교육과정에서 경영학을 배우지 않은 간호사들은 이것을 이해하거나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어 요즈음은 이 직업을 등지는 간호전문요원이 점점 더 늘어난다. 또 하나의 악순환이다.
따라서 나는 직원들이 어떻게 하면 좌절하지 않고 이 상황에 적합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전문간호기술을 계속 연마하여 환자와 간호사가 동시에 만족하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며 고심한다. 이 길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인간사회를 만드는 길이기에 나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난민(bootspeople)이세요?" 어느 날 내가 일하는 방문간호센터의 사무실을 찾아온 한 중년부인이 나를 보고 묻는다. 가정간호에 대한 상담을 하러 나를 찾아 온 사람이 자기의 용건보다 소장이라고 소개하는 한 아시아 여성의 정체가 더 궁금한 모양이다.
"아닙니다. 나는 간호전문직 여성으로 독일에 와서 일한 지 삼십 년이 넘습니다." 저 부인의 눈을 가리는 타민족에 대한 선입관은 어떻게 하면 한 겹이나마 벗겨질까? 일반 독일사람들은 60년대 중반과 70년대에 간호요원이 부족해서 독일의 많은 의료기관들이 폐업직전이던 위기상태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 당시 외국에서 불러들인 간호인력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나 그 후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간호인력부족은 오늘날 독일의 간호의료계에 비상사태를 초래하고 있지 않는가?
독일이 경제정책의 필요에 따라 외국에서 노동력을 불러들인 것은 간호인력이 들어오기 훨씬 전이다. 1955년 독일은 이탈리아와 협정을 맺고 이탈리아에서 집단적으로 노동력을 수입해 오기 시작, 스페인과 그리스(1960년), 터키(1961년), 모로코(1963년), 한국(1963년 광부, 1965년 간호사), 포르투갈(1964년), 튀니지(1965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1968년)에서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였다.
'독일 산업전선 노병'은 영원하다
그러면서 이전에 사용되던 '외국인노동자(Fremdarbeiter)'라는 말은 이 시기에 와서는 '손님노동자(Gastarbeiter)'로 바뀌었다. "당신들은 예전처럼 외국인 머슴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손님 같은 일꾼들이오"라는 일견 호의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그러나 당신들은 손님인 만큼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당신 나라로 돌아 가야한다"는 의미도 부여하고 있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 그 젊든 일꾼들은 이제 고령의 이주민이 되었다. 그들, '독일 산업전선의 노병들'이 없었더라면 '라인강의 기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독일사회는 "노동자를 불렀더니 사람이 왔네!"라는 정책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이주민들의 정착이나 노후에 관한 무관심은 1995년에 실시된 간병보험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간병보험의 자료통계수치나 방문간호제도의 기본정책에서 노령화에 따른 인구수의 변화를 측정할 때, 독일국적이 아닌 상당수에 해당하는 타민족의 노인 숫자가 현실에 맞게 고려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여러 문화권에서 온 이주민 노인환자들의 복합적이며 다각적인 현 생활조건도 간과되게 마련이다.
나는 한 의료기관의 책임자로서 일상에서 이주민들이 타당한 의료지원과 혜택을 받도록 특별히 유의한다. 이것은 내가 이주민 여성으로서 독일에 살고있는 이주민들의 지위향상과 권익옹호를 위해 할 수 있는 나의 한 몫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지난 7월 독일 의료정책에 대한 반대시위에 나선 방문간호센터 직원들과 나 (왼쪽에서 두번째, 키 큰 남자 구경꾼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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