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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여성모임과 나

신뢰와 우정의 문이 열리는 곳 -송현숙- 신뢰와 우정의 문이 열리는 곳 -송현숙- 나는 1972년 독일에 도착해서 아주 작은 도시의 한 병원에서 4년간 간호보조사로 근무했었다.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1977년 함부르크로 이사를 한 후, 학생기숙사에서 살게 되자 한국 사람들과 만나는 날이 점점 적어갔다. 병원에서 같이 근무하며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다시 귀국을 했거나 아니면 다른 도시로 가서 자기 생활에 바빠 서로 간의 연락도 끊겼다. 대학에서는 나이가 들어 공부를 하려고 하니 배워야할 것도 많고 독일어도 새로 익혀야 했다. 또 독일친구와 연애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한국 사람들과 가깝게 어울리지 않아도 잘 생활해 나갈 줄 알았다. 그런 후 1년이 지나서부터 무엇인가 나 자신이 한국과 아주 멀어진 것 같고 나의 정체성이 모두 상.. 더보기
아량과 인성으로 우리의 능력을 연마하는 곳 -김현숙- 아량과 인성으로 우리의 능력을 연마하는 곳 -김현숙- 여성모임과 나와의 첫 만남은 아마도 1977년 Frankfurt의 한 회원 집에서였다. 여성모임이 발족되기 이전이었고 독일의 아시아 간호사추방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모였었다. 만 명의 서명을 모으기 위한 서명서를 작성하고 일을 분담하고 또한 이 사실을 각 도시마다 한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토론하였다. 독일 정부와 정치 그리고 외국인법을 문제화시키며 외국인 간호사 추방에 반대하는 활동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의 사고방식과 지식 그리고 도덕관념으로는 정치, 경제 또는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남자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활동에 동참함을 계기로 나의 삶과 생활에 변화가 .. 더보기
아기 걸음마에서 뚜벅뚜벅 걷기까지 -김양순- 아기 걸음마에서 뚜벅뚜벅 걷기까지 -김양순- 나는 독일에 간호사로 왔다가 브라질에 이민 가서 가족을 이루었고, 그곳에 살면서 그곳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그 국민성이 나에게 잘 맞아 내 것으로 알고 살다가, 하던 사업이 안 되는 바람에 결국 14년의 브라질 생활을 뒤로하고 독일로 다시 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독일생활에 다시 적응하기가 너무나 어려웠고, 특히 몸도 마음도 독일에서의 생활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이제야 어느 정도 자리도 잡히고 적응도 되어 내 삶에 대한 회고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브라질에서 돌아온 후 그게 1988년이었다. 당시 여성모임 이숙자 회원의 권유로 그 당시 뮌헨의 김현숙 회원 집에서 열린 여성모임 대표회의에 참석하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그 회의에 참석하게된.. 더보기
서로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곳 -박인숙- 서로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곳 -박인숙- 나는 독일에 와서 약 10년 간 한국인과의 접촉이 없이 살았었다. 우연히 클라우젠호프에서 한-독 가정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여성모임회원이었던 장혜숙을 사귀게 되었다. 나는 에센에 살고 장혜숙은 보쿰에 살다보니, 자녀들과 남편들도 서로 사귀게 되었다. 여성모임에 나와 보라는 권유를 받고 여성모임에 나가보니 힘센 여성들이 많았다. 그 동안에 한국어를 많이 잊어버리고 또한 독일어도 뭐 그렇게 능통한 상태도 아니어서 처음에는 주눅이 들었다. 김양순 회원 비슷하게 삶이 뭔가 뒤죽박죽 되는 느낌이었는데, 세미나 참가이후 집에 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나 자신이 어떻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성모임회원들이 능력이 많으니 내.. 더보기
내 삶의 여정의 동반자 -유정숙- 내 삶의 여정의 동반자 -유정숙- 이제 나의 독일 삶이 19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중에서 약 16년 간 나는 여성모임에 몸을 담고 있는 셈이다. 만약에 재독한국여성모임이 이 독일 땅에 없었다면 여기서의 나의 삶이 어떠하였을까? 하고 언젠가 나는 질문을 해보았다. 그런데 상상을 해 보려고 한참 이리 저리 회고를 해 보았으나 결국에는 상상이 안돼 이 질문을 잊기로 하였다. 결국 나의 삶에서 여성모임이 그 만큼 이미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삶의 여정을 동반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현재에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현재 나는 우리 여성모임의 총무직을 맡고 있다. 그러니까 1989년에도 한 번 이 직을 맡았으니 두 번째로 다시 맡은 셈이다. 그 당시의 여성모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 더보기
세계인으로 고민하고 연대하는 단체 -김순임- 세계인으로 고민하고 연대하는 단체 -김순임- 1980년 5월 TV와 라디오를 통해서 접하게 된 광주 5월 항쟁의 무참한 소식은 그 때까지 안일무사주의로 살아온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체험하게 했다. 광주에서 어린 중 고등학생들이 두루미에 꾀인 조기들처럼 묶여서 군인들의 총칼위협을 받으며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평화로운 독일 안방에 앉아서 TV를 시청하는 나는 분노와 절망의 참담한 감정의 회오리를 정리하기 어려웠다. 나는 나와 가정, 나와 사회, 나와 조국, 나와 세계는 어떠한 연관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이렇게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내 감정이 내동댕이 쳐버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까지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된 나는 빨갱이와 간첩들이 우글거린다는 베를린에서 의식적으로 교포사회에서 고립된 생활을.. 더보기
사랑과 믿음이 긷든 우리들의 집 -안차조- 사랑과 믿음이 긷든 우리들의 집 -안차조- 여성모임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것은 나에게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966년 10월 Niedersachsen Verden의 시립병원에 근무를 하고 있을 때 한국 유학생과 인연을 맺어 베를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아이 둘을 낳았다. 병원 근무와 집안 일로 보낸 나의 첫 독일생활은 나의 삶에 대하여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나의 위치에 대한 의식 없이 살았었다. 아이들 아빠와 헤어지던 해인 1980년. 나의 끝없는 괴로움을 풀고 싶은, 한국말로 나의 아픔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한없이 헤매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함께 베를린에 있는 한국여성모임에 참석했다. 그 당시 여성모임에서는 한국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나는 꿔다놓은.. 더보기
배움의 터, 새로운 무늬 -조국남- 배움의 터, 새로운 무늬 -조국남- 가끔 나는 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구체화시켜서 알록달록한 색실로 짜 올라가는 직물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날실이 팽팽히 죄어진 베틀 앞에 마주 앉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각 개개인이 자기의 인생이라는 천을 짜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종류의 그리고 무슨 색상의 실이 선택되어서 어떤 무늬가 짜여 나올까 하는 호기심도 함께 천에 박힌다. 여성모임은 내가 독일 사회에서 한 이주민여성으로서의 직물을 짜나가는데 늘 새로운 무늬를 제공해 주었다. 조직의 사업과 활동 속에서 얻는 성취감이나, 회원들 간에 맺어지는 우애, 한국에서 온 이주민 1세 여성으로서 찾아가는 나의 위치와 입장, 아이들의 성장, 나 스스로의 자립 등의 셀 수 없는 문양.. 더보기
따뜻한 포용 속에서 누리는 연대감 -한정로- 따뜻한 포용 속에서 누리는 연대감 -한정로- 여성모임과 내가 첫 인연을 맺은 시기는 여성모임이 창립된 몇 년쯤 후였던 것 같다. Neukoelln의 한 가정집에서 만나는 여성모임에 참석하면서 첫 접촉을 맺었다. 그 뒤 나의 학교생활 시작 등으로 바쁘면서도 TAM의 모임에 간혹 참석했었다. 그 당시 회원들에 대한 첫 인상은 처음 오는 사람에게 따뜻하거나 친절하게 대하면서 적극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줄 것 같은 분위기가 적어 보여서, 마치 관청에 온 것 같은 조금 냉정한 분위기로 느껴졌었다. 그렇다고 회원이 되기를 간청하거나 설득하는 시도도 없었기에, 개개인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전달이 존중되고 개개인의 입장을 중요시하는 단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후 여성모임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일은 간.. 더보기
공동의 경험을 나누며 모든 회포를 풀 수 있는 곳 -박재신- 공동의 경험을 나누며 모든 회포를 풀 수 있는 곳 -박재신- 1970년 5월 6일 내가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는 어둡고 춥고 배고플 때였었다. 그때 시립 우르반 병원에서 꽃다발로 날 환영해 주었고, 운 좋게도 병원의 공사를 마무리되지 않아 3개월 동안 괴테 어학원에서 언어연수만 해도 되었다. 독일에 대한 사전지식은커녕 독어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고 소양교육/반공교육만 받은 우리는 헬레나라는 간호사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시립병원은 거의 30%이상이 한국인 간호사로 운영되는 상황이어서 언어소통은 그런 데로 되었다. 그런데 스위스의 비타 생명보험회사는(Vita Versicherung) 우리를 속여 생명보험을 들게 하여 장기동안 머무는 이에게는 해를 끼친 경험이 있다. 모친께서는 내가 파독될 당시.. 더보기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발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광장 -오선녀-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발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광장 -오선녀- 내가 여성모임을 알게 된 것은 약 20년 전 즈음 같다. 공부를 할 때 한두 번 여성모임에 참석 한 적이 있다. 마음이 분주하게 살다보니 관심과는 달리 자주 참석하질 못했다. 난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거의 한국인과 접촉이 없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관심이 여성모임에 생겼고 또 여성과 가정상담을 하는 나로서는 독일인의 그리고 다른 외국인의 문제를 다루면서 한국인들의 생활에도 관심이 생겼다. 내 직장을 통해 내게 오는 사람들은 90년대에는 약 75%가 독일인이었고 외국인들 중에서는 터키인들이 많았고 그 나머지는 동유럽 사람들, 소련, 폴란드, 유고, 필리핀, 타이랜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등의 사람들이었다. 2000년에 들어서면.. 더보기
주체적 여성들의 열린 별장 -강여규- 주체적 여성들의 열린 별장 -강여규- 2003년 8월 7일부터 11일까지 재독한국여성모임 25주년 기념문집과 자료정리를 위해 편집위원들이 우리 집에 모였다. 40도까지 올라가는 살인적 더위가(이 더위로 유럽연합에는 만 여명의 노인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극성이었다. 더워 죽을 지경인데 불때서 음식까지 만들어야 하니 부엌은 말 그대로 한증막이었다. 정말 에어컨 생각이 간절했고, 이럴 때는 전화 한 통으로 짜장면이며, 콩국수 같은 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는 한국자본주의의 서비스업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모른다. 이런 와중에 여성모임 회원들은 고물 '메이드 인 차이나'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하면서 머리 맞대고 열심히 일을 해 나갔다(몸에 땀띠가 난 회원도 있었음). 우리에게 밥해준다고 사진 자료.. 더보기
세계 여성들과 함께 차별 없는 사회로 -주재순- 세계 여성들과 함께 차별 없는 사회로 -주재순- 나는 여자로 성장하면서 받은 차별대우가 나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을 항상 느끼고 산다. 거기다가 타국에 와서 받는 인간차별대우 또한 나의 정의심을 더 돋구어 주어 서로 동등하게 대우해 주고 존경을 받는 사회, 나의 삶을 만들려고 노력을 한다. 젊어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개인을 인정하고, 직위나 성, 문화 차이를 중시 않고 함께 추구하는 목적을 따라 가면 될 것이다 하면서 노력을 했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오해, 의사소통 문제가 자꾸 일어나는데, 개인 차원이 아닌 사회체계와 교육성장문화차원에서 오는 문제가 많은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차별대우에 예민하다보니 당연히 나의 경험과 거기에 따라 오는 감정을 분석하고, 왜 이런가, 어떻게 하면.. 더보기
내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마당 -김정숙- 내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마당 -김정숙- 1980년 광주에서 대학생, 시민항쟁이 투열하던 피비린내 나든 5월! 지금 함부르크에서 살고 있는 전라도가 고향인 친구 정현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얘, 정숙아, 테레비 봤니?” “왜?” “한 번 봐봐. 기가 막히고 치가 떨릴 거야.” 난 당장 테레비를 켜 보는 순간 너무도 아찔했다. 무작정 패대는 군인경찰들, 맘대로 휘두르는 그들의 총칼질 앞에서 엎드려 있는, 질질 끌려가는 젊은이들! 이것이 과연 내 조국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 눈물이 그칠 새 없이 흐르고, 흐르고 또 흘렀다. 이 젊은이들의 부모님들께선 얼마나 불안 속에서 떨고 계실까?! 얼마 후 다시 현옥이 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숙아, 테레비 봤니? 야, 우리 이러고 가만히 있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