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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믿음이 긷든 우리들의 집 -안차조- 사랑과 믿음이 긷든 우리들의 집 -안차조- 여성모임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것은 나에게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966년 10월 Niedersachsen Verden의 시립병원에 근무를 하고 있을 때 한국 유학생과 인연을 맺어 베를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아이 둘을 낳았다. 병원 근무와 집안 일로 보낸 나의 첫 독일생활은 나의 삶에 대하여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나의 위치에 대한 의식 없이 살았었다. 아이들 아빠와 헤어지던 해인 1980년. 나의 끝없는 괴로움을 풀고 싶은, 한국말로 나의 아픔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한없이 헤매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함께 베를린에 있는 한국여성모임에 참석했다. 그 당시 여성모임에서는 한국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나는 꿔다놓은.. 더보기
아들 기대 속 셋째 딸로 태어나... (조국남) 아들 기대 속 셋째 딸로 태어나...조국남(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보면 거의가 남자라 짐작을 해서 그런지 나는 가끔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국 공관에서 보내오는 우편물의 수신인 난에는 아주머니(Frau) 대신 아저씨(Herr)란 호칭이 딸려 온다. 한국 사람들도 이러한데 하물며 한글이름자가 풍기는 울림이나 뜻에 서투른 독일사람들이야 어떠하랴. 이곳 독일 관청에서도 일반적으로 외국인의 이름에서 남녀의 성구별이 어려우면 우선은 남자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은 남성중심시대의 산물로, 아니면 현시대의 산 증거로 봐야 할까? 자녀들은 자라면서 대개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한다.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만큼 그 기대에 상응하는 자녀노릇.. 더보기
Publikationen Publikationen Bücher und Filme ▶ Dokumentation "Unterschriftenaktionen gegen die Ausweisug koreanischer Krankenschwestern", 1979 ▶ "Made in Korea" : Broschüre über den Arbeitskampf der Arbeiterinnen bei "Flair Fashion", in Zusammenarbeit mit Terre des Femmes, 1989 ▶ "Die Bescheidenheit ist vorbei" : Darstellung der Arbeitsverhältnisse bei "Flair Fashion" in Zusammenarbeit mit Terre des Femmes, 1.. 더보기
배움의 터, 새로운 무늬 -조국남- 배움의 터, 새로운 무늬 -조국남- 가끔 나는 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구체화시켜서 알록달록한 색실로 짜 올라가는 직물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날실이 팽팽히 죄어진 베틀 앞에 마주 앉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각 개개인이 자기의 인생이라는 천을 짜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종류의 그리고 무슨 색상의 실이 선택되어서 어떤 무늬가 짜여 나올까 하는 호기심도 함께 천에 박힌다. 여성모임은 내가 독일 사회에서 한 이주민여성으로서의 직물을 짜나가는데 늘 새로운 무늬를 제공해 주었다. 조직의 사업과 활동 속에서 얻는 성취감이나, 회원들 간에 맺어지는 우애, 한국에서 온 이주민 1세 여성으로서 찾아가는 나의 위치와 입장, 아이들의 성장, 나 스스로의 자립 등의 셀 수 없는 문양.. 더보기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이방인... (안차조)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이방인... 안차조(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독일에서 나의 삶은 올해 33년째가 된다. 그리고 독일국적을 취득한 지도 22년이 되어, 독일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살고 있다. 나는 생활 속에서 필요에 따라 한국인이 되고, 또 독일인이 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 그 원인들을 분석해보면, 매우 복잡하며 애매한데, 문제는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나의 행동양식을 은연중에 요구한 것에도 큰 몫이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독일문화로의 적응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동양 여성의 수동적 이미지를 당연하게 요구했다. 이 모순된 요구는 이중문화권에서 사는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마주하는 공통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나 자신과의 갈등을 자주 겪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자.. 더보기
따뜻한 포용 속에서 누리는 연대감 -한정로- 따뜻한 포용 속에서 누리는 연대감 -한정로- 여성모임과 내가 첫 인연을 맺은 시기는 여성모임이 창립된 몇 년쯤 후였던 것 같다. Neukoelln의 한 가정집에서 만나는 여성모임에 참석하면서 첫 접촉을 맺었다. 그 뒤 나의 학교생활 시작 등으로 바쁘면서도 TAM의 모임에 간혹 참석했었다. 그 당시 회원들에 대한 첫 인상은 처음 오는 사람에게 따뜻하거나 친절하게 대하면서 적극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줄 것 같은 분위기가 적어 보여서, 마치 관청에 온 것 같은 조금 냉정한 분위기로 느껴졌었다. 그렇다고 회원이 되기를 간청하거나 설득하는 시도도 없었기에, 개개인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전달이 존중되고 개개인의 입장을 중요시하는 단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후 여성모임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일은 간.. 더보기
어려운 출국(김순임) 어려운출국김순임 1966년 4월 28일 김포공항은 독일 라인마인 지역으로 취업차 출국하는 128명의 간호사들과 그들을 전송 나온 가족, 친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날 선배언니와 나를 제외한 모든 간호사들은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있어서 힘든 노동의 대가로 외화획득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라고 보다는 어떤 친선문화사절단이 대거 출국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의 마음은 그러한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그냥 빨리 탑승을 했으면 하는 초조한 기분 속에 젖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의 뒷덜미를 잡고 너는 못가 하고 끌어 낼 것 같은 불안한 심정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1962년 봄 광주간호학교를 졸업한 후 연령 미달로 6 개월을 기다린 후 양호교사로 재직 중 일간지에서 해외개발공사 광고를 보고 파독 간호사.. 더보기
재독한국여성모임과의 첫 만남 (유정숙) 재독한국여성모임과의 첫 만남유정숙 재독 한인 여성회 회원 1985년 4월, 나는 이미 나이 서른이 넘어 독일에 왔다. 그때까지 한국에서 살아온 삶을 다 물리치고 다섯 살 된 딸아이와 독일의 탄광도시인 보쿰에 도착하였다. 남편도 같이 왔다. 처음 일년간 박사과정의 이수에 필요한 어학코스를 할 동안 나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외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이미 변화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것 하나는, 내 주변의 "독일적" 상황이 내가 다 "물리치고" 온 한국 생활을 정신적으로 정리하고, 현재를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데 더 없는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 여성으로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아 갈등을 느끼며 왜 이래야만 할까라는.. 더보기
가정 기울며 대학 중퇴하고... (손행자) 가정 기울며 대학 중퇴하고...손행자(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학교 다닐 적에 제일 어려웠던 과목이 국어였다. 그런데 신문에 내 글을 싣는다니 망설여지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도 경제난 때문에 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서 나의 경험담을 써서 알리는 것이 도움이 될까하여 용기를 내게 되었다. 나는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는 무난하게 세상물정 모르고 학교공부만 충실해왔다. 그러나 아버님이 4·19 뒤 군수, 경찰서장 등 일괄 처리에 몰려 본인의 잘 잘못과 무관하게 직장을 물러나시게 되었다. 그 후 아버님은 장사 중에 그래도 고상한 것이 서점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항상 읽고 공부하시는 자신의 성격에 맞아서 택하셨는지 광주 계림동에 서점을 여셨다. 그 때가 내가 조선대 약대에 입학하던 해였다. 어버님.. 더보기
암담했던 '서울의 봄' 뒤로하고 (강여규) 암담했던 '서울의 봄' 뒤로하고강여규(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내가 독일에 온 것은 80년 3월, 박정희가 암살된 후 불확실한 희망이 존재하던,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던 시기였다. 최루탄 가스와 휴교령이 반복되던 대학시절을 등뒤로 나는 조금은 도망가는 심정으로 유학을 택했다. 박정희 정권의 병영화한 사회에서,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자"는 구호와 함께 물신주의가 팽배해진 사회에서, 그것을 위해 노동자의 인권이 참혹하게 짓밟히고, 모든 비판적 목소리가 빨갱이로 도장 찍히는 숨막히는 사회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단속을 피해야 하고,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에 불안해하면서, 남자친구들이 데모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군대에 끌려가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비굴을 강요당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가난하고 초라했던 우.. 더보기
독일 적응하자 찾아온 '향수병' (한정로) 독일 적응하자 찾아온 '향수병'한정로(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에 대한 나의 관심은, 한국간호사 추방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으로 시작됐다. 80년도 중반에는 한국 및 아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생관광의 문제점을 토론하는 세미나 등에 참가했고, 한국의 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한 운동이 계기가 되어 90년부터 정식회원이 되어 지금까지 여러 활동에 참여해왔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50년 긴 세월의 침묵을 깨고, "정신대" 문제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했다는 사실이 독일 매스컴에 퍼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 "정신대" 문제를 알게 되었다. 사태를 이해하자 잔혹했던 일본 정부에 대해 분노가 치솟았다. 그 후 나는 정신대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정대협과 협력하며 독일 내 여론 형성을 위해 .. 더보기
"내가 왜 독일간호사 식사준비나 하느냐"... (김정숙) "내가 왜 독일간호사 식사준비나 하느냐"...김정숙(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파독 간호사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접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당시의 눈물로 보낸 세월이었다. 그러나 슬픔의 눈물만은 아니었고 기쁨의 눈물도 없지 않았다. 내가 이곳으로 올 작정을 한 것은 먼저 왔던 친구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보고 난 뒤였다. 이 편지는 나를 황홀의 경지로 몰았다. 이 친구가 사는 집에는 수영장이 있어 근무가 끝나면 언제나 수영을 할 수가 있고, 그토록 갖고 싶었던 스테레오 전축도 2개월 일한 월급으로 구입할 수가 있고, 헤르만 헤세의 추종자들인 히피들과 함께 거리를 누비며, 카라얀의 지휘아래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베토벤을 들을 수 있고, 시내 중간 중간에 있는 공원잔디에 누워서 괴테의 책을 읽고.. 더보기
공동의 경험을 나누며 모든 회포를 풀 수 있는 곳 -박재신- 공동의 경험을 나누며 모든 회포를 풀 수 있는 곳 -박재신- 1970년 5월 6일 내가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는 어둡고 춥고 배고플 때였었다. 그때 시립 우르반 병원에서 꽃다발로 날 환영해 주었고, 운 좋게도 병원의 공사를 마무리되지 않아 3개월 동안 괴테 어학원에서 언어연수만 해도 되었다. 독일에 대한 사전지식은커녕 독어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고 소양교육/반공교육만 받은 우리는 헬레나라는 간호사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시립병원은 거의 30%이상이 한국인 간호사로 운영되는 상황이어서 언어소통은 그런 데로 되었다. 그런데 스위스의 비타 생명보험회사는(Vita Versicherung) 우리를 속여 생명보험을 들게 하여 장기동안 머무는 이에게는 해를 끼친 경험이 있다. 모친께서는 내가 파독될 당시.. 더보기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발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광장 -오선녀-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발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광장 -오선녀- 내가 여성모임을 알게 된 것은 약 20년 전 즈음 같다. 공부를 할 때 한두 번 여성모임에 참석 한 적이 있다. 마음이 분주하게 살다보니 관심과는 달리 자주 참석하질 못했다. 난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거의 한국인과 접촉이 없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관심이 여성모임에 생겼고 또 여성과 가정상담을 하는 나로서는 독일인의 그리고 다른 외국인의 문제를 다루면서 한국인들의 생활에도 관심이 생겼다. 내 직장을 통해 내게 오는 사람들은 90년대에는 약 75%가 독일인이었고 외국인들 중에서는 터키인들이 많았고 그 나머지는 동유럽 사람들, 소련, 폴란드, 유고, 필리핀, 타이랜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등의 사람들이었다. 2000년에 들어서면.. 더보기
주체적 여성들의 열린 별장 -강여규- 주체적 여성들의 열린 별장 -강여규- 2003년 8월 7일부터 11일까지 재독한국여성모임 25주년 기념문집과 자료정리를 위해 편집위원들이 우리 집에 모였다. 40도까지 올라가는 살인적 더위가(이 더위로 유럽연합에는 만 여명의 노인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극성이었다. 더워 죽을 지경인데 불때서 음식까지 만들어야 하니 부엌은 말 그대로 한증막이었다. 정말 에어컨 생각이 간절했고, 이럴 때는 전화 한 통으로 짜장면이며, 콩국수 같은 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는 한국자본주의의 서비스업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모른다. 이런 와중에 여성모임 회원들은 고물 '메이드 인 차이나'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하면서 머리 맞대고 열심히 일을 해 나갔다(몸에 땀띠가 난 회원도 있었음). 우리에게 밥해준다고 사진 자료.. 더보기
세계 여성들과 함께 차별 없는 사회로 -주재순- 세계 여성들과 함께 차별 없는 사회로 -주재순- 나는 여자로 성장하면서 받은 차별대우가 나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을 항상 느끼고 산다. 거기다가 타국에 와서 받는 인간차별대우 또한 나의 정의심을 더 돋구어 주어 서로 동등하게 대우해 주고 존경을 받는 사회, 나의 삶을 만들려고 노력을 한다. 젊어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개인을 인정하고, 직위나 성, 문화 차이를 중시 않고 함께 추구하는 목적을 따라 가면 될 것이다 하면서 노력을 했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오해, 의사소통 문제가 자꾸 일어나는데, 개인 차원이 아닌 사회체계와 교육성장문화차원에서 오는 문제가 많은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차별대우에 예민하다보니 당연히 나의 경험과 거기에 따라 오는 감정을 분석하고, 왜 이런가, 어떻게 하면.. 더보기
여성모임 바셀로나 단체여행 (2004년 10월 25일 - 11월 1일) 바르셀로나(Barcelona) 여행길조국남 2003년 10월25일 토요일오늘은 오래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드디어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날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모두 만나기로 한 우리 일행은 각자가 사는 도시에서 새벽부터 움직이기 시작하여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모두 모였다. 듣자하니 손행자, 박인숙 그리고 유정숙회원은 Duesseldorf 공항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느라고 그 전날 박인숙 집에 가서 묵고 새벽 3시 반에 일어났다고 한다. 그들은 Barcelona에는 오전 9시 반에 도착하여 짐을 내린 후 시장으로 나가 식품과 생활필수품을 사다들이고 특히 5리터 짜리 물병을 여러 개 사들고 오느라 몸살을 앓으면서 오후에 도착할 회원들을 위해 음식준비를 해 놓았다. 송현숙회원은 Hamburg공항.. 더보기
루쯔와 라이카 (류현옥) 더보기
10 Jahre - meine Zeit im Hospiz. (류현옥) 더보기
내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마당 -김정숙- 내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마당 -김정숙- 1980년 광주에서 대학생, 시민항쟁이 투열하던 피비린내 나든 5월! 지금 함부르크에서 살고 있는 전라도가 고향인 친구 정현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얘, 정숙아, 테레비 봤니?” “왜?” “한 번 봐봐. 기가 막히고 치가 떨릴 거야.” 난 당장 테레비를 켜 보는 순간 너무도 아찔했다. 무작정 패대는 군인경찰들, 맘대로 휘두르는 그들의 총칼질 앞에서 엎드려 있는, 질질 끌려가는 젊은이들! 이것이 과연 내 조국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 눈물이 그칠 새 없이 흐르고, 흐르고 또 흘렀다. 이 젊은이들의 부모님들께선 얼마나 불안 속에서 떨고 계실까?! 얼마 후 다시 현옥이 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숙아, 테레비 봤니? 야, 우리 이러고 가만히 있을 .. 더보기
오월민증제- 19.-21.05.2006 더보기
재유럽오월민중제- 27.-29.05.2005 더보기
오월민중제- 14.-16.05.2004 더보기
2. Kongreß internationaler Frauen(26.-28. März 2004 더보기
25주년 기념 행사 초대장, 03.-05.10.2003 25주년 기념 행사 초대장, 03-05.10.2003 더보기
오월 민중제- 23-25.05. 2003 더보기
가을 세미나 및 제 18차 총회 - 13.-15.10. 1995 더보기
최순영, 박성자 강연회- 16.04.1996 더보기
한독세미나 - 20.-23.05.1994 더보기
가을 세미나 및 제 17차 총회- 07.-09.10.1994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