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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한국여성모임 제 34차 총회와 봄세미나 열려 - 안차조 교포신문 기사 더보기
여성모임 단체여행 (한겨례 신문 기사) 험한 타국살이 버텨낸 한국인의 힘 76년 강제해고 송환 대응 위해 첫 조직 꾸려 노동탄압, 정신대문제 알리고 모금활동 펼쳐 회원 12면 인종차별, 향수담은 에세이집 펴내 "(1968) 경부고속도도를 놓을 당시 독일에 갖고,(도로를) 계속 놓기 위해 일했죠." 1970년 간호사로 취업하기 위해 독일에 간 박정숙(56)씨는 지금 치과의사다.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해 밤을 밝혀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린 박씨는 85년 치과의사가 됐다. 박씨처럼 72년 간호사로 독일에 갔던 송현숙(55)씨는 현지에서 미숙을 공부하고 지난 84년 전남대로 유학을 와 한국미숙사를 다시 익혔다. 간호사에서 화가로 변신하게 된 내력을 ㅅㅇㅆ는 "한국과 독일의 문화적 차이를 그림일기식으로 그리기 시작한 게 계기였고 .. 더보기
2010년 재독한국여성모임 봄세미나에 다녀와서 - 류현옥 kor2.doc 더보기
재독한국여성모임 2009년 봄세미나에 다녀와서 - 류현옥 더보기
"재독한국여성모임 2008년 가을세미나에 다녀와서" - 이정회 지난 5월 4일부터 5월 6일 사이에 빌레펠트에서 „이슬람과 여성“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재독한국여성모임의 봄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과속화되어지고 있는 지구화현상은 이 곳 독일을 비롯한 다른 유럽공동체국가내에서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인 충돌과 이해대립을 첨예화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대두되고 있는 종교적인 문제를 여성의 문제와 연결시켜 재조명하고자 재독한국여성모임은 이 세미나를 마련했다. 금요일 저녁시간에 상영된 우리학교라는 도큐멘타필름은 에다가와 조선학교에서 전개되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의 현황을 다루고 있었으며 이들의 민족교육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결성된 KIN(지구촌동포청년연대)과 전국교직원 참교육연구소 민족교육연구실의 에다가와 조선학교 문제대책위원회와 국내 시민단체 및 .. 더보기
"재독한국여성모임 2007년 가을세미나에 다녀와서" -이정회 재독한국여성모임 2007년 가을세미나 이정회 변호사 (베를린 거주) 재독한국여성모임에서 주최한 가을세미나가 2007년 11월 16일부터 18일까지 베를린 클라도우에서 아주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열렸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출간된 한일 여성공동저서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 근현대사”를 소재로 지난 15년 동안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위안부 희생자의 보상 및 명예회복을 위해 오랜 연대활동을 해온 베를린 일본여성회와 함께 마련한 세미나였다. 기존의 역사책이 그 당시의 여성의 역할과 역사상의 중요성을 도외시한 반면 여성의 관점에서 재조명된 한일 근현대사를 일본여성들과 함께 한 자리에 모여 토론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이 번 세미나는 더욱더 의미가 깊었다.. 더보기
Seminar 20-23.04.2012(풍경신문) 더보기
Seminar 20-23.04.2012(교포신문) 23 교포신문 2012 년 05 월 20 일 재독한국여성모임 제 34 회 총회와 봄 세미나 - 안차조 재독한국여성모임의 제 34 차 총회 및 봄 세미나가 2012 년 4 월 20 일에서 23 일까지 뮌헨인근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Erzabtei Sankt Ottilien)에서 열렸다. 이 수도원은 1909 년부터 천주교 수도자들을 조선으로 파견하여 우리나라에 최초의 천주교수도원을 건립한 본거지로 한국천주교의 역사와 연관이 깊은 곳이다. 그로 부터 일 세기가 지난오늘 재독한국여성모임이 그 곳에서 우리의 정신문화의 근본인 불교에 대한 세미나를 하게 된것은 상당히 의미 깊은 일이었다. 금요일 저녁 프로그램은 각 지역에서 참석한 회원들의 동정을 경청하고 세미나에 새로 참석한손님들과 서로 사귀면서 시작 되었다... 더보기
Seminar 20-23.04. 2012(베를린 리포트) 더보기
재독한국여성모임과 베를린일본여성이니시어티브의 공동세미나 참가기 - 류현옥 더보기
재독한국여성모임 30주년 생일잔치에 다녀와서 -류현옥 더보기
재독한국여성모임 30주년 행사(우리신문) kor_aktuell_30jahre_doc9.pdf 더보기
한국민주화 도우미’ 재독한국여성모임 30돌(한겨례) -한주연 더보기
재독여성모임 창립 30 주년 축전 참관기-이은희 더보기
여성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아시아여성영화제>, 안숙영 박사, 2007 여성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단법인 황해도 한뜻계 보존회가 개막식에 축원굿으로 안숙영박사 재독한국여성모임이 주최한 (Asian Women’s Film Festival)가 지난 9월 23일 저녁 한국의 임순례 감독이 만든 „와이키키 브라더스“(Waikiki Brothers)의 상영을 끝으로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베를린 아시아태평양 주간“(Asien-Pazifik-Wochen Berlin) 행사의 하나로 지난 9월 19일부터 5일 동안 아르제날 극장(Kino Arsenal)에서 열린 이 영화제에는 많은 관객들이 찾아옴으로써, 유럽에서 아시아와 여성을 주제로 한 영화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서울여성영화제가 협력하고 주독 한국대사관 문화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진흥위원회 및 삼성전자.. 더보기
고국답사기 2006년 10월 23-30일 가을길에서 (2006년 10월 고국답사기)김순임 10 월 23 일 화요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오늘부터 8 일 동안 함께 여행할 여성모임 회원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떠 올려본다. 정숙, 국남, 차조, 금희, 숙희, 영옥, 정자, 미자, 숙영... 약간 이상한 기분이다. 서울에서 만나게 되다니.... 출근을 서두르는 벤지에게 “지하철역 독립문을 어떻게 가지?” 하고 물으니, “엄마 택시 타고 가 한다.” 방향감각이 별로 둔하지 않다고 자부 하는데 서울에 오면 언제나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친척 중 한사람이 항상 가이드로 따라 나서든지 아니면 택시를 이용하고 만다. “기사님 독립문에서 제일 가까운 출구에 내려주세요.” 하고 택시 기사 에게 약간 걱정서린 목소리로 부탁했더니 기사는 나를 힐긋 쳐다.. 더보기
한겨례신문 기사(2006년 10월 31일) 더보기
Lieblingsgeschichte -Sun-Ju Choi 더보기
신뢰와 우정의 문이 열리는 곳 -송현숙- 신뢰와 우정의 문이 열리는 곳 -송현숙- 나는 1972년 독일에 도착해서 아주 작은 도시의 한 병원에서 4년간 간호보조사로 근무했었다.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1977년 함부르크로 이사를 한 후, 학생기숙사에서 살게 되자 한국 사람들과 만나는 날이 점점 적어갔다. 병원에서 같이 근무하며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다시 귀국을 했거나 아니면 다른 도시로 가서 자기 생활에 바빠 서로 간의 연락도 끊겼다. 대학에서는 나이가 들어 공부를 하려고 하니 배워야할 것도 많고 독일어도 새로 익혀야 했다. 또 독일친구와 연애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한국 사람들과 가깝게 어울리지 않아도 잘 생활해 나갈 줄 알았다. 그런 후 1년이 지나서부터 무엇인가 나 자신이 한국과 아주 멀어진 것 같고 나의 정체성이 모두 상.. 더보기
아량과 인성으로 우리의 능력을 연마하는 곳 -김현숙- 아량과 인성으로 우리의 능력을 연마하는 곳 -김현숙- 여성모임과 나와의 첫 만남은 아마도 1977년 Frankfurt의 한 회원 집에서였다. 여성모임이 발족되기 이전이었고 독일의 아시아 간호사추방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모였었다. 만 명의 서명을 모으기 위한 서명서를 작성하고 일을 분담하고 또한 이 사실을 각 도시마다 한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토론하였다. 독일 정부와 정치 그리고 외국인법을 문제화시키며 외국인 간호사 추방에 반대하는 활동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의 사고방식과 지식 그리고 도덕관념으로는 정치, 경제 또는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남자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활동에 동참함을 계기로 나의 삶과 생활에 변화가 .. 더보기
아기 걸음마에서 뚜벅뚜벅 걷기까지 -김양순- 아기 걸음마에서 뚜벅뚜벅 걷기까지 -김양순- 나는 독일에 간호사로 왔다가 브라질에 이민 가서 가족을 이루었고, 그곳에 살면서 그곳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그 국민성이 나에게 잘 맞아 내 것으로 알고 살다가, 하던 사업이 안 되는 바람에 결국 14년의 브라질 생활을 뒤로하고 독일로 다시 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독일생활에 다시 적응하기가 너무나 어려웠고, 특히 몸도 마음도 독일에서의 생활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이제야 어느 정도 자리도 잡히고 적응도 되어 내 삶에 대한 회고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브라질에서 돌아온 후 그게 1988년이었다. 당시 여성모임 이숙자 회원의 권유로 그 당시 뮌헨의 김현숙 회원 집에서 열린 여성모임 대표회의에 참석하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그 회의에 참석하게된.. 더보기
서로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곳 -박인숙- 서로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곳 -박인숙- 나는 독일에 와서 약 10년 간 한국인과의 접촉이 없이 살았었다. 우연히 클라우젠호프에서 한-독 가정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여성모임회원이었던 장혜숙을 사귀게 되었다. 나는 에센에 살고 장혜숙은 보쿰에 살다보니, 자녀들과 남편들도 서로 사귀게 되었다. 여성모임에 나와 보라는 권유를 받고 여성모임에 나가보니 힘센 여성들이 많았다. 그 동안에 한국어를 많이 잊어버리고 또한 독일어도 뭐 그렇게 능통한 상태도 아니어서 처음에는 주눅이 들었다. 김양순 회원 비슷하게 삶이 뭔가 뒤죽박죽 되는 느낌이었는데, 세미나 참가이후 집에 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나 자신이 어떻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성모임회원들이 능력이 많으니 내.. 더보기
내 삶의 여정의 동반자 -유정숙- 내 삶의 여정의 동반자 -유정숙- 이제 나의 독일 삶이 19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중에서 약 16년 간 나는 여성모임에 몸을 담고 있는 셈이다. 만약에 재독한국여성모임이 이 독일 땅에 없었다면 여기서의 나의 삶이 어떠하였을까? 하고 언젠가 나는 질문을 해보았다. 그런데 상상을 해 보려고 한참 이리 저리 회고를 해 보았으나 결국에는 상상이 안돼 이 질문을 잊기로 하였다. 결국 나의 삶에서 여성모임이 그 만큼 이미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삶의 여정을 동반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현재에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현재 나는 우리 여성모임의 총무직을 맡고 있다. 그러니까 1989년에도 한 번 이 직을 맡았으니 두 번째로 다시 맡은 셈이다. 그 당시의 여성모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 더보기
세계인으로 고민하고 연대하는 단체 -김순임- 세계인으로 고민하고 연대하는 단체 -김순임- 1980년 5월 TV와 라디오를 통해서 접하게 된 광주 5월 항쟁의 무참한 소식은 그 때까지 안일무사주의로 살아온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체험하게 했다. 광주에서 어린 중 고등학생들이 두루미에 꾀인 조기들처럼 묶여서 군인들의 총칼위협을 받으며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평화로운 독일 안방에 앉아서 TV를 시청하는 나는 분노와 절망의 참담한 감정의 회오리를 정리하기 어려웠다. 나는 나와 가정, 나와 사회, 나와 조국, 나와 세계는 어떠한 연관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이렇게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내 감정이 내동댕이 쳐버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까지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된 나는 빨갱이와 간첩들이 우글거린다는 베를린에서 의식적으로 교포사회에서 고립된 생활을.. 더보기
공부가 싫었던 말괄량이의 좌절... (송금희) 공부가 싫었던 말괄량이의 좌절...송금희(심리치료사, 보육교사) 한국은 내가 태어나 자라고 사춘기를 보낸 '모국'이다. 그러나 한국은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나라이기도 했다. 30여 년 동안 독일 생활을 하면서 항상 향수에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가 있을 때면 여전히 불편해 하는 나를 느낀다. 왜 그럴까? 한국에서 살던 시절의 열등감이 해소되지 않은 탓일까? 나는 팔 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 시절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유교적인 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라난 우리 어머니는 나 역시 아들이길 바라셨다. 아들이길 바랬던 막내딸은 이번에는 '여성스럽게' 자라나 주길 바랬던 당신의 뜻과는 달리 수줍음을 모르는 사내아이 같았다. 위로 세 언니들이 있었기에 내 또래의 다른 여자 친구들 보다 나 자신.. 더보기
사랑과 믿음이 긷든 우리들의 집 -안차조- 사랑과 믿음이 긷든 우리들의 집 -안차조- 여성모임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것은 나에게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966년 10월 Niedersachsen Verden의 시립병원에 근무를 하고 있을 때 한국 유학생과 인연을 맺어 베를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아이 둘을 낳았다. 병원 근무와 집안 일로 보낸 나의 첫 독일생활은 나의 삶에 대하여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나의 위치에 대한 의식 없이 살았었다. 아이들 아빠와 헤어지던 해인 1980년. 나의 끝없는 괴로움을 풀고 싶은, 한국말로 나의 아픔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한없이 헤매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함께 베를린에 있는 한국여성모임에 참석했다. 그 당시 여성모임에서는 한국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나는 꿔다놓은.. 더보기
아들 기대 속 셋째 딸로 태어나... (조국남) 아들 기대 속 셋째 딸로 태어나...조국남(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보면 거의가 남자라 짐작을 해서 그런지 나는 가끔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국 공관에서 보내오는 우편물의 수신인 난에는 아주머니(Frau) 대신 아저씨(Herr)란 호칭이 딸려 온다. 한국 사람들도 이러한데 하물며 한글이름자가 풍기는 울림이나 뜻에 서투른 독일사람들이야 어떠하랴. 이곳 독일 관청에서도 일반적으로 외국인의 이름에서 남녀의 성구별이 어려우면 우선은 남자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은 남성중심시대의 산물로, 아니면 현시대의 산 증거로 봐야 할까? 자녀들은 자라면서 대개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한다.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만큼 그 기대에 상응하는 자녀노릇.. 더보기
배움의 터, 새로운 무늬 -조국남- 배움의 터, 새로운 무늬 -조국남- 가끔 나는 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구체화시켜서 알록달록한 색실로 짜 올라가는 직물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날실이 팽팽히 죄어진 베틀 앞에 마주 앉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각 개개인이 자기의 인생이라는 천을 짜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종류의 그리고 무슨 색상의 실이 선택되어서 어떤 무늬가 짜여 나올까 하는 호기심도 함께 천에 박힌다. 여성모임은 내가 독일 사회에서 한 이주민여성으로서의 직물을 짜나가는데 늘 새로운 무늬를 제공해 주었다. 조직의 사업과 활동 속에서 얻는 성취감이나, 회원들 간에 맺어지는 우애, 한국에서 온 이주민 1세 여성으로서 찾아가는 나의 위치와 입장, 아이들의 성장, 나 스스로의 자립 등의 셀 수 없는 문양.. 더보기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이방인... (안차조)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이방인... 안차조(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독일에서 나의 삶은 올해 33년째가 된다. 그리고 독일국적을 취득한 지도 22년이 되어, 독일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살고 있다. 나는 생활 속에서 필요에 따라 한국인이 되고, 또 독일인이 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 그 원인들을 분석해보면, 매우 복잡하며 애매한데, 문제는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나의 행동양식을 은연중에 요구한 것에도 큰 몫이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독일문화로의 적응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동양 여성의 수동적 이미지를 당연하게 요구했다. 이 모순된 요구는 이중문화권에서 사는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마주하는 공통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나 자신과의 갈등을 자주 겪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자.. 더보기
따뜻한 포용 속에서 누리는 연대감 -한정로- 따뜻한 포용 속에서 누리는 연대감 -한정로- 여성모임과 내가 첫 인연을 맺은 시기는 여성모임이 창립된 몇 년쯤 후였던 것 같다. Neukoelln의 한 가정집에서 만나는 여성모임에 참석하면서 첫 접촉을 맺었다. 그 뒤 나의 학교생활 시작 등으로 바쁘면서도 TAM의 모임에 간혹 참석했었다. 그 당시 회원들에 대한 첫 인상은 처음 오는 사람에게 따뜻하거나 친절하게 대하면서 적극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줄 것 같은 분위기가 적어 보여서, 마치 관청에 온 것 같은 조금 냉정한 분위기로 느껴졌었다. 그렇다고 회원이 되기를 간청하거나 설득하는 시도도 없었기에, 개개인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전달이 존중되고 개개인의 입장을 중요시하는 단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후 여성모임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일은 간.. 더보기